헬레니즘의 시작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를 비롯해 당시 알려진 세계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356년부터 323년까지 황제를 다스렸다. 주전 336년에 그는 아버지 필립2세가 정복한 그리스 도시국가를 이어 받고 323까지 다스렸다. 그러나 유대공동체에는 별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다 정복자체는 앗시리아 , 바빌로니아, 폐르시아에 정복당하다가 이제는 서부에게 정복당했다. 그러나 이번의 차이는 그 정복자가 서쪽에 서 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두 가지 정책의 변화를 주었다. 그리스 정책으로 1) 문화적인 것이요, 2) 지리적인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군사적 승리뿐만 아니라 정치적 확장 과 경제적 이익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자기네들의 생활 방식을 바꾸거나 새로운 도시 폴리스( Police)을 재편함으로써 헬레니즘을 전파했다. 유대지역에도 한 세기 못되어 벧스안과 사마리아 그리고 요단 동편에 신도시를 건설했으며 이와 동신에 그리스 방식을 따르는 생활이 들어왔다. 이는 그리스 법을 통하여 정치가 운영되었고, 그리스 신들이 들어오면서 문화적 결과를 가져 왔다.

 

유대의 핵심적 위치

 

알렉산더 정보의 지리적 결과는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기원적 323년에 알렉산더가 죽고 그의 제국의 붕괴되면서 유다는 정치, 군사 활동의 소용돌이로 내던져졌다. 알렉산드리아에 수도를 둔 애굽의 프톨레미 왕가와 시리아에 본거지는 둔 셀류코스가 서로 격돌하는 전장(戰場)이 되었다. 기원전 3세기의 두 국가 사이의 다섯 차례의 전쟁이 지속되면서 유대 전역에 수비대가 배치되었고, 대규모 군대가 나라 곳곳에 배치되었다.

물론 알렉산더의 정복이후부터 프톨레미 왕국이 유대를 장악했을 때는 많은 예루살렘 주빈들은 이들을 환영했다. 이는 다른 문화에서 오는 기회와 매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당국에서는 주전 300-250년 사이에 제조한 은화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에 대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인상적으로 표현해 준다. 이 동전에는 애굽 지도자인 프톨레미 1, 그의 부인 베레니케(Berenike) 및 독수리의 형상을 담고 있다.

예루살렘의 지배 계층과 헬레니즘 세계 사이에 연결고리의 다른 예는 주전 270년경 유대인 제사장 오니아스 (Onias)2세와 스파르타(Sparta)의 왕 아오레스 (Areus), 사이에 왕래한 서신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마카베오상(1 maccabees,12:5-23)과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주민과 스파르타 사람들 사이에 동맹이 맺어졌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로도스( Rhodes)의 공식인장이 찍힌 1000개 이상의 항아리 손잡이에서 로드스 사제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면 그들의 연대가 주전 4세기-1세기 까지로 추정한다. 이 항아리들은 지중해 동부를 통해 수입된 포도주를 담는데 사용했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자기들의 마시기 위해 로도스 포도주를 수입했을 것이다.

 

헬레니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평가

 

유대인 공동체는 전체적으로 이 새로운 실재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에 대해 확실한 자료들이 부족하여 적절할 대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헬레니즘의 지배, 남쪽 ( 프톨레미 왕조)과 북쪽 (셀류코스 왕조)를 지지하는 분파들로 나누어 정치적 성향의 양극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차이의 심화 및 전통적 종교 신념과 관습에 대한 도전으로 인하여 분열된 양상을 보였을 것이다.

비커먼(Bickerman과 헹엘(Hengel)은 헬레니즘의 영향력이 심오했을 것으로 본다. 그런가 하면 체리코버(Tcherikover), 샌드멀( Sandmel), 밀러 (Millar)등은 영향력이 사소하고 피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이때의 성서 전도서(Qohelet)는 이 새로운 환경이 종교적이고 지적인 헌신에 미친 혼란스런 영향력에 대한 현존하는 자세한 진술로 남아 있다. 여기에 보면 유대 공동체에는 믿음과 확실성은 사라졌고 그 대신에 의심, 머뭇거림, 회의가 들어왔다. 2세기에 벤 시락은 이런 사조에 응답하는 책( Ecclesiastucus: 작은 전도서)으로 전통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는데, 이 시기에 묵시 문학이 등장하는데, ( 예를 들면 에녹서), 이 문학의 장르는 무엇보다도 천국 여행에 대한 묘사, 인간에게 우주의 신비를 계시해 주는 천사, 마지막 날에 대한 환상,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내릴 마지막 심판 등을 그리고 있다. 기원전 165년에 쓰인 다니엘의 후반부(7-12)도 이때에 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묵시문학의 출처가 성서시대 초기 예언자들의 직접적인 문헌인가? 아니면 헬레니즘의 묵시문학과 사상에 대한 노출과 관련하여 유대사회가 새롭게 발전된 결과인가? 하는 문제는 확실한 해답을 줄 수는 없지만 동시대의 현상과 관계를 증명할 만큼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보겠다. 이런 점에 보면 프톨레미2세 필라델푸스 (주전 285-246)의 후원아래 기록한 ‘70인 역성경(Septuagint)은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리스 식 사고방식이 예루살렘 학계에 스며들어 갔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다.

한편 셀류코스의 지도자 안티오쿠스( Anticous)3세는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주전200년경)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전통적인 지위와 도시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 해 주는듯한 특권을 부여 했다. 장로들, 대제사장, 제사장들 및 다른 성전 근무자들을 공동체의 지도자로 인정받아 그에 맞는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유대 공동체는 신앙의 먹구름이 뒤덮게 되었다. 예를 들면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는 토비아(Tobiad)은 유대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유대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감행했는데, 그들의 이름, 태도, 생활양식들에 그리스 식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더 복잡한 상황은 셀류코스 왕들은( 마카베오하4) 로마에 매년 조공을 바치느라고 재정이 극도로 궁핍하였다. 주전 175년에 제사장 혈통의 야손(Jason)을 새롭게 권자에 오른 셀류코스 의 군주 안티오쿠스 4(에피파네스)에게 돈을 바쳐 자기를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게 했다. 야손은 이에 힘입어 예루살렘은 그리스 폴리스로 개조할 권리를 부여 받았다.

그래서 예루살렘 주민들이 폴리스의 주민으로 등록하고 체육학교인 김나지음 (Gymnasium)과 에페비움(Ephebium)인 군사학교를 세워서 운동과 군사 훈련을 통하여 헬라 문화에 동화하는 작업을 이행했다.

 

 

안티오커스 4세의 무거운 짐과 마카비 가문의 등장

 

야손이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고 예루살렘이 폴리스가 된 후, 안티오커스4세가 횃불정렬과 열렬한 환호 속에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방문했다.

주전 172년 또 한명의 예루살렘 제사장 메넬라우스(Menelaus) 가 야손의 선례를 따라 야손 대신 자기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해 달라고 셀류코스 왕에게 뇌물을 바쳤다. 이를 위해 성전창고를 약탈하는 중, 야손의 지지자들과 메넬라우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분노를 일으키며 폭력사태가 일어났으나. 진정되었다.

폭력사태는 주전 169-168에 다시 불붙었는데, 이번에는 안티오커스4세가 원인을 제공했다.

먼저 그는 성전을 약탈하면서 그 일부는 파괴했다. 그 후에 맹렬한 분노를 품고 돌아온 안티오쿠스는 야손이 메넬라우스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생겨난 소요 사태를 진압했다. 약탈과 대학살이 자행되었고 도시 일부가 불에 탔다.

이번에는 셀류코스의 군대가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지 않았고, 그곳에 수비대를 두었으며 아크라(Akra) 라는 요새를 건설했다. 요세프스는 이 아크라가 다윗의 성에 있지만 성전 산 (temple mount)보다는 높은 위치였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헤롯의 요새 안토니아( Antonia)가 지어진 성전 언덕에의 북서쪽에 있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훌다 성문 (Huldah Gates)편이든 맞은편에 있다고 추정한다.

안티오커스는 예루살렘을 공격한 후 1년 정도 지난 주전 16712월에 칙령을 발표하여 할례, 종교적 연구, 종교적인 관습( 안식일과 절기)를 금지시킨다. 더 나가 안티오쿠스는 신성한 성전에서 이방의 예배를 도입함으로 유대인들의 신성을 더럽혔다.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혼란이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수동적으로 침묵했으나 많은 유대인들은 유다 광야로, 혹은 유다 국경을 넘어 달아났다. 어떤 유대인들은 세속적인 방법을 단념하고 신비주의-메시아적 열망에서 위안을 구했다( 7-12).

이 칙령들이 시행된 이듬해 유대 북서부에 외딴 성읍 모디인(Modiin)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이로서 모디인의 독립항쟁의 시작된 것이다. 맛다디아(Mattathias)라는 이름의 제사장과 그이 다섯 아들인 유다 마카비(Judah Maccabee), 시몬(Simon), 요하난(Johanan), 엘르아살 (Eleazar), 요나단(Jonathan)에 의해 조직되었다. 나중에 이들은 450년 만에 처음으로 주권 국가를 다시 세우고 왕들이 다스리는 유대 왕조를 창립하게 된다( 하스모니안 왕국).

 

유대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

 

그러나 하스모니아 가문의 권력 획득은 25년의 투쟁 끝에야 성공한 험난한 과정이었다. 이 사반세기는 네시기로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주전 166-164, 이 시기는 계속 되는 게릴라전의 시기였다. 유대인들은 유다 마카비의 지휘아래,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곳에 있는 수비대를 보강하려고 셀류코스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셀류코스의 군대는 북쪽, 북서쪽, 서쪽, 남쪽, 등 여러 방향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했으나 매번 패하고 그들의 무기는 끓임 없이 성장하는 마카비 군대에게 빼앗겼다. 주전164년 봄에 벧술(Beth-Zur, 예루살렘 남쪽)에서 치러진 전투는 유일하게 결론에 이르지 못했는데, 일시적인 휴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6개월 후에 유다 마카비와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에 있는 시리아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정화하고 유대인희 희생 제사를 복원했다. 그때가 1641225일이다. 이때를 기념하여 수전절(10:22)을 지키게 되엇다.

 

2. 주전 164-160, 이시기는 지금까지 마카비 가문의 운명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성전회복과 정화를 이룩한 그들은 더 나아가 요단 동편, 갈릴리, 지중해안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여 원수를 갚았다.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예루살렘에 다시 정착했다. 그러나 주전162년에는 안티오커스 4세의 군대와의 예루살렘 동쪽 벧- 스가랴( Beth-Zechariah) 근처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안티오커스 4세의 군인들은 승리의 열매를 충분히 차지하기 전에 리시아스( lysias)사령관과 그의 군대의 즉각적인 귀환이 요구되는 안디옥

( Antioch, 시리아의 수도)의 급한 전갈을 받았다. 이때 휴전 협상은 유대인에게 유리하게 체결되었다. 먼저 유대인들의 관습을 금지하는 모든 칙령들을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이때 유대인 온건파들 쪽에서는 온건한 헬라주의자인 알키무스 (Alchimus)라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수용했다. 또한 초기 경건주의 집단인 하시딤( Hasidim)을 비롯한 유대 주민들 대부분이 이 협상에 만족해 보인다. 그러나 하스모니아 지도자와 부대는 이 타협안을 거부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후퇴해야 했다.

다음해 주전162년에는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 북쪽 아다사(Adasa)에서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소집하여 그리스장군 니카노르(Nicanor)를 무찔렀다. 그러나 이때 시리아의 반격으로 수적 열세에 있는 마카비 군대는 곤욕을 당하다가 유다 마카비가 전하여 위기를 당했다.

 

3. 주전162-152, 이 시기는 하스모니아 운명의 쇠퇴기이다. 예루살렘에는 하스모니아 지지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일단 베들레헴 남동쪽, 유다 광야에 있는 드고아 (Teqoa)지역으로 달아났다. 거기에서 다시 쫓겨난 그들은 유대 믹마스( Michmash)에 정착하여 권력무대를 뒤로하고 직위나 특권도 없이 반 격리 상태로 살아 있었다.

 

4. 주전 152-141, 이 시기는 하스모니아 우세기(優勢期)로서 독립적인 유다 주권국가에 설립의 절정에 이르렀다. 주전 152년에 셀류코스 왕위를 주장하던 알렉산더 발라스( Alexander Balas)와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유다 마카비의 형제이며 하스모니아 지도자인 요나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특권과 명예를 제공했다. 이때 데메트리우스는 요나단에게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두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주전 141년에는 마카비 형제 중 막내인 시몬이 대제사장직과 정치적 지도력을 차지했다. 그리고 시리아 수비대의 잔당들과 헬라주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이어서 셀루코스 의 통치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세 가지 업적 즉 마카비는 주전 162년에 종교적 자유를 , 주전152년에는 요나단이 제사장권을 되찾았고, 주전 141년에는 독립하여 하스모니아 왕국의 자유로운 시대를 여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그 비밀은 거룩한 성전과 거룩한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성심과 온가족 구성원의 카리스마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의 결합

 

하스모니아 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정치적 환경은 급진적으로 변했다. 이미 152년에 요나단은 대제사장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리고 주전141년에는 백성의 지도자와 군대의 지휘관 (strategos)-를 갖게 되었기에 주권국가로서 정치적 권위나 종교적 최고직책을 회복한 것은 유대 역사에 있어서 실로 혁명적인 일이다. 이 결합은 극도로 대담한 정치적, 군사적 정책에 동기를 부여하고 정당화해주는 이념적 요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하스모니아 통치의 확장과 종말

 

이시기에 하스모니아 지도자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유다의 지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일이다. 페르시아 시대와 헬레니즘 초기에는 자그만 주()였던 유대가 이제는 이스라엘 전체( 남부 네겝과 북부 해안지방을 제외한)와 남부 레바논의 일부와 서부 요르단을 포한한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1) 시몬 때는 이스라엘의 공문서 유다인의 사제이며 사령관이며 지도자인 시몬 제1년이라 쓰 며 예루살렘 동전에 시몬을 넣음으로써 하스모니아 왕국의 시작을 알렸다.

시몬은 북서쪽 방향으로 공격하여 게셀을 점령하고 ( 마카베오13), 욥바를 점령하여 하스모니아의 주요 항만 교역지로 삼았다.

2) 그의 아들 힐카느스(주전135-104)는 자기 아버지에 이어 세력을 해안을 따라 더 확장했고, 요단강 동편에 주둔군을 배치하고 남부 유다와 북부 네겝의 이두매 사람들과 북쪽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처하는 일에 정력을 바쳤다. 그는 시몬의 국토확장정책을 지지하여 사무엘 상하에 집중하여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로 알았다. 이때 에돔 사람들 억지로 할례 받게 하여 강제로 유대인으로 개종시키는데, 이로 인하여 훗날 헤롯 가문의 유대인의 왕이 되게 했다.

3) 아라스토불루스 1(주전104-103)가 시몬의 뒤를 이어 왕으로 계승했다. 3명의 형제를 모두 죽이고 1년을 통치하다가 죽었다.

4) 알렉산더 안네우스( 주전103-76)는 그의 형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감옥에서 나왔고 그의 형의 미망인인 살로메와 결혼했다. 그는 북서쪽으로는 스트라토의 탑(후에 가이사랴가 됨)과 돌( Dor)을 장악했고, 남서쪽으로는 헬라풍의 주요 도시인 가자 (Gaza)을 포함한 해안지역을 점령했다. 하스모니아 주화에는 히브리어 문자로 적은 것을 보면 다윗왕조의 동일시하려는의도를 볼 수 있다.

5) 알렉산드라 살로메(주전 76-67)

남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여자이기에 대사제직은 할 수 없어서 장남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직을 맡고 군대의 통솔권은 차남 아리스토불루스가 갖고 산헤드린 회장은 남동생 시몬 벤슈타가 맡았다.

6)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르스2(67-63)

여왕인 살로메가 주전 67년에 죽자 그 아들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 이때 권력 투쟁하는 사이 로마가 기다리고 있다가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지원하다가 주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에게 항복함으로써 제사장 권은 아리스토불르스에게 왕권을 로마의 통치하게 있게 되었다.

 

하스모니아 지도자들의 종교적 이념

 

종교적인 영역에서 하스모니아 지도자들은 자기네 영토에서 모든 우상 숭배적 관행을 척결하는데 헌신했다. 땅의 종교적 정화가 근본정책이 되었다.

하스모니아 시대는 주요한 양대 분파로서 사두개파( Saducees)와 바리새파(Pahsrisees) 통치자의 내각을 자리 잡았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계열의 귀족계층의 호위적이었던 요한 힐카누스 와 절친한 관계이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을 정계에서 쫓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알렉산더 얀네우스 시대에는 바리새인들이 얀네우스를 향해 공개적인 적대감을 표현했고, 심지어는 시리아 왕 데메트리우스 4세에게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줄 것을 부탁했다.

오히려 이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고, 그의 후계자이며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리아가 등극했을 때는, 바리새인들을 복직시켰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두개인들이 보복을 당했다.

이들에 반반한 사람들이 에세네파( Essenes )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유다광야의 외딴 지역에 정착했다. 거기에서 거룩하게 자신을 정결케 하고 임박한 메시야 오시기를 고대했다.

시대에는 이두메 사람들의 개종이 있었다.

이런 현상은 격정과 이념적 경직성을 정치 무대에 불어 넣을 긴장을 증대시키기만 할 따름이다.

 

헬레니즘과 유대주의의 독특한 통합

 

엘리아스 비커만(Elias Bickerman)은 하스모니아 지도자들은 온건한 헬레니즘의 형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헬레리즘의 형태를 유다주의에 적합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다. 언어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이다. 헬라어 명문은 유대인 지도자의 헬라식 직함() 과 그의 헬라식 이름 ( 알렉산더 안네우수)을 사용하고 있으며, 히브리어 동전들은 그의 유대 직함( 대제사장)과 히브리어 이름 ( 요나단)을 사용한다. 하스모니안 왕가의 지도자들 힐카누스, 아리스토불루스, 안티고누스, 알렉산더가 헬라어 이름이며 지도자들이 헬라어 이름을 좋아하고 있다.

게다가 히브리어 문자는 후대 아람어의 정사각형모양이 아니라 제1 성전 기에 유행했지만 제2 성전 기에는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던 옛 형태이다.

이 주화에는 새겨진 상징은 하스모니아 지도자들의 태도를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종려나무 가지, , 풍요의 뿔, 바퀴/별 등이 프톨레미의 주화, 셀류코스의 주화, 등이 발견된다. 예외가 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손자이며 마지막 지도자인 안티고누스(Mattathias Antigonus:주전 40-37)가 발행한 동전인데, 거기에는 촛대와 진설병 상이 있다.

헬레니즘의 영향력은 헬라어 이름이나 물질문화(예술과 건축)에 국한하지 않는다. 나가서는 결혼 법에도 적용한다. 예를 들면 신랑이 신부의 가족과 계약을 맺으면서 그들을 위해 일정량의 돈이나 재산을 따로 떼어 놓아야 했었다. 이런 제도는 메소포타미아의 옛 관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면에서 종합적으로 관찰하면 하스모니아 국가는 유다의 정체성을 다양한 헬레니즘의 표현과 통합하는 새로운 유대적 경향성을 구체화했다. 어느 정도 조정과 변경을 통하여 헬레니즘의 여러 형태를 자기들의 생활양식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스모니아 통치하의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

 

하스모니아 왕국의 창설은 그 수도 예루살렘 예루살렘에 혁명적인 영향을 비쳤다. 주전 6세기의 성전은 다윗성과 언덕을 합하여 약 30에이커였으며 인구는 약, 5,000-6,000명 정도 였다. 이 상황이 거의 400( 주전 540-140)동안 이어졌다. 그러다가 하스모니아 지도자가 다스릴 때는 5배 이상 확장되어 160에이커 이상 늘어나면서 인구는 약 30,000명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서편 언덕산(시온산)전체와 오늘날의 다윗의 성채( 욥바 문까지)포함한다.

그 시대의 성전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하스모니아 정치적 입지 향상의 결과로 증대되었다.

이 내용은 마카비서에 기록하고 있다. (주전175-160년까지 )

당시 가장 중요한 기관들이 성전 경내나 성전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은 다양한 국가적 연중 기념행사를 행하는 식장으로 사용되었다. 국가의 최고 법원의 회의 장소였으며 하스모니아 동전에 나오는 헤베르 하 여후딤( 유대인 최고 공의회의 통치기관) 의회의 장소이기도 했다.

하스모니아 시대에 일반 유대인의 종교는 상당부분 성전과 성전의 의식 및 규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헌물을 내는 것과 별도로 유대인은 첫 열매와 가축의 첫 새끼도 예루살렘에 가져왔다. 세 번의 순례 절기도 모두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와서 지켰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 외의 분파들

 

요세푸스가 언급한 세 분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는 주전 2세기 중엽에 발생했던 것같다. 쿰란에 있었던 사해 분파의 최초 유적은 주전140-130년경의 것이다. 랍비자료에 따르면 최초의 바리새파 학자들은 주전 160-150년대 활동했으며, 마찬가지로 사두개파도 주전2세기 중엽에 출현했다고 본다.

이는 당대의 정치적 격변- 폴리스로 변형된, 예루살렘, 안티오쿠스의 박해, 마카비 항쟁, 그리고 마침내 , 독립국가의 건설은 분명히 사회의 종교적 삶에 심오한 영향을 비쳤을 것이다 .

 

사두개파 (역대상 24:6)

이들은 사독의 후손으로서 다윗시대의 제사장인 사독의 후손이라 생각한다. 솔로몬 시대 제사장들이기에 솔로몬 성전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 1)토라의 권위로서 기록된 율법. 2)성전의 제사의식, 3)지금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 status quo) 것에 관심이 치중한다.

야손, 메넬라우스, 그리고 결국 하스모니아 가문에 의한 대제사장 직 박탈로 인해 사독의 자손들은 세 집단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오니아스 4세의 추종자들이 당시 하스모니아 지도자들의 통치하에서 프톨레미 왕조의 후원을 받아 이집트 레온코 폴리스에 성전을 건립했다.

둘째는 유대광야로 물러났다. 에세네 파의 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셋째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스모니아 지도층과 결탁하여 향후 두세기 동안 그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부류가 되었다. 이 세 번째의 부류를 사두개인들( Sadducees) 라고 한다.

이 사두개인들은 힐카누스의 통치말(주전 110년경)에는 모든 권력을 사로잡았다.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103-76)에는 바리새인들과 알력 속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다가 얀네우스의 부인인 살로메(주전 76-67)때에는 바리새인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그들의 후원자는 대중들이 아니라 부자들이나 집권층이었다. 후에는 명맥을 유지하다가 성전의 소멸되면서 그들의 사역도 사라졌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아무런 기록 문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에세네파

요나단이 왕이 되자(주전142년 경), 하시딤과 바리새인이 정치적으로 사두개인들의 처사에 반대했다. 이에 사해 바다 북서쪽에 광야에서 은둔한 했는데, 4000명이라고 한다. ‘에세네 의인이라는 아람어이다. 이들은 매사에 정욕을 억제하고 절제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 다. 그들은 육체는 없어지지만 영혼은 영원불멸하다고 믿었다. 세례요한이 에세네 출신이다.

이들은 거주하는 곳인 쿰란 공동체는 68년 로마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요세푸스와 필로는 쿰란에서 고고학적 발굴된 사해 두루마리와 거의 천편에 달라는 자료들이 고대 후기유대교 역사에서 나타난 독특한 한 분파인 것을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한다.

처음 학자들은 쿰란 혹은 사해 분파 주의자들의 정체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예를 분파 내에

여성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 주는데, 문서 자료들은 평화주의자들에 대해 말한다.

이런 불일치로 인해 거의 모든 조직화된 유대인 집단- 바리새파, 열심당(Zealots), 사두개파, 보에투스파(Boethusians),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해 분파와 동일시 될 수 있는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지냔 몇 십 년 후에 걸쳐 사해 분파가 실체고 에세네파라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들 다양한 특징들이 에세네 분파내의 하위집단의 다른 시기임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바리새파

 

 

이들은 시몬( 주전143-134)과 요한 힐카누스( 주전134-104)때에 정치가 너무 사두개파에게 기울여져 있고, 헬라적이요,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을 때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생긴 학파이다. “ 바리새(Phaisee)”라는 이름은 나누다혹은 떨어져 서다. 분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파라슈(Parash) 에서 파생되었다. 그들은 지배적인 계습, 새로 등장한 하스모니아 왕조의 정치, 군사정책, 청결법과 십일조 법을 엄격하게 준수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분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루이스 핑켈슈타인(Louis Finkelstein)은 바리새인들은 기본적으로 부산 계습으로 보았고, 그들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환경에 의해 형성했다고 본다. 반면에

아이잭( 프리츠) 베이어(IsaacFrizBaer)는 바리새의 뿌리를 시골의 경건한 집단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바리새파는 헬레니즘으로 이방화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했다. 613개의 조항을 지키는 최고 엄정한 해석자들로 자처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 살로메과 왕일 때 그의 남동생 벤 슈타이가 산헤드린 의장이 됨으로 유대의 최초 의무교육제도를 재정하였다 모든 남자는 의무적으로 글을 새워서 가정에서 성서를 가르침으로 세속화를 막고 유대의 정통성을 지켜 나갔다.

바리새파 중에서 랍비 문학이 형성되어 그들은 Beth HillelBeth Shammai 학원을 통하여 그 유명한 힐렐( Hillel)학파와 샴마이( Shammai) 학파를 배출했다.

바리새파가 사두개파와 다른 점은 구전 율법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구전 율법은 기록율법과 나란히 놓고 둘이 합하여 온전한 율법을 이른다는 것이다. 이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모세의 다섯 권의 책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구전 전승도 함께 주었다는 것이다.

 

대중적 유대교

 

하스모니아 시대에 대중이 따랐던 유대교는 어떤 유대교였을까? 그들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중적인 삶에 대한 알려주는 자료들은 거의 없다. 이시대의 주민들은 대부분은 암 하아레츠( ‘am ha-arets)라 불리는 모호한 집단에 속해 있었다. 이 용어는 랍비 문학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스모니안 시대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생활의 여러 기본 지침을 보면 그들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토라를 주신 하나님 한분에 대한 신앙이었다. 이 계시는 걔인으로서, 백성의 일원으로서 유대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지키는 것이 보상을 가져 오고 범죄는 처벌될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 언약을 파괴하더라도 회개 (teshuvah)를 통해 갱신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주변의 이방문화와 비교할 때 그들을 묶어 주는 것이었다고 본다.

 

유대 주권의 종말

폼페이가 주전 63년 유대를 정복하면서 유대는 주권을 로마에게 빼앗겼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요세푸스는 여기에 대한 긍정적으로 답했다. 힐카누스2세와 아리스토불루스2세 형제 사이에 상호 파괴적인 싸움이 파멸로 몰아갔다.

그 형제가 함께 노력하여 공동으로 폼페이와 협상을 벌였다면 그 토록 심한 손실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데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물론 하스모니의 내부 정치와 관계없이 로마는 동방을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럴지라도 단결했더라면 실제보다 덜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이런 면은 역사에 큰 교훈이 될 것이다.

 

토론(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을 법을 찾아내기 위한 )

 

구약시대와 신약을 잇는 시대에 연결고리로서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은 무엇인가?

때가 차매 그리스도가 오실텐데, 메시야를 기다리는 중간사시대가 준비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already, not yet의 시대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가 시대를 향하여 대언해야 할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