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팔레스타인 밖의 유대인(이스라엘의 역사개관)
 주제어  [이스라엘] [유대인]
 자료출처  이스라엘문화원  성경본문  
 내용

유대인은 기독교와 모슬렘의 통치하에서 살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대가로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고, 모슬렘은 무하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지도 않고 코란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을 박해했다. 모슬렘 통치하에서는 기독교 국가에서보다 다소 억압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고난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유대인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법으로 공포했다.  
기독교 국가에 정착한 유대인은 모슬렘 세계에 서구의 일용품을 공급해 주었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 상인이 이러한 무역을 연결함으로써, 근동과 서유럽을 왕래하는 무역에 종사하게 된다. 이들 유대 상인 중 일부는 궁정과 연결되어 상류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유대인 무역상이 지방 무역에 개입하자, 봉건 영주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유대인 무역상을 활용하였다. 화폐가 중요성을 더 할수록 그들의 활동은 도시 경제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8세기초 아랍이 스페인을 공격하고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자 스페인의 유대인은 약 3백년간 자유롭게 시, 철학, 과학뿐 아니라 유대교를 발달시킬 수 있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인은 또한 아랍 문화를 유럽에 전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 중세의 유대인

십자군은 유대인을 핍박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시켰다. 무역과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생계 유지를 위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토지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대금업(貸金業)이었다. 12,13 세기 기독교인에 대한 유대인의 고리 대금업은 때로 금지 당했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자(1348-1349),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의심을 받는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다. 유대인은 개종을 강요당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죽임
을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비밀리에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 추방당한 이들은 그리이스, 북아프리카, 오스만 제국 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오스만 제국은 비교적 유대인에게 관대했다.  16세기 주변 세계는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1516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을 게토
(Ghetto 鑄造場)라는 구역에 격리시킨다. 16세기에 도시의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자 추가로 구역이 할당되었으며 같은 이름이 주어졌다. 이리하여 게토는 유대인이 강제로 살게 되는 격리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655년에 비엔나의 게토에 살던 유대인은 모두 5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곧 게토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 보헤미아의 도시에도 생겨난다. 중세 말 게토는 유럽에서 공식적인 기구가 되어, 유대인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에 직면한다. 그러나 주변 세계와 단절된 게토에서 유대인은 자유롭게 토라에 열중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교육을 통하여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게토에서의 삶은 한편으로 유대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 유대교 사상의 발전과 사상가들

모슬렘 시대는 가온(Gaon 뛰어난 자. 6세기 -11세기)이라 불리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탈무드 연구가 부활되었으며 바벨론의 수라와 품베디타는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문제는 가온이 제시하는 지도에 의존하며, 바벨론의 가온이 그 역할을 상실하자 이집트, 스페인, 독일의 탈무드 학자들이 이 책임을 맡게 된다.
이집트 출신으로 바벨론의 수라에서 가온으로 임명된 사디야 가온(Saadyah ben Joseph 882-942)은 유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처음으로 체계적인 유대 철학을 정립했다. 그는 문법, 사전 편집, 시, 주석, 기도문, 달력 제정의 분야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성경의 아랍어 번역이며 주석인 '타프실'(Tafsir)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과 기독교 학자에게는 표준 성경이 되었다.
스페인 출신의 이븐 가비롤 (Solomon Ibn Gabirol c.1021-1056)은 네오 플라톤 철학자로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바벨론에서 유럽으로 옮겨 놓았다. 그는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 자극을 받아 철학적 시를 구상해 냈고 이러한 시의 일부는 유대인의 기도문에 포함되었다. 시적 철학 작품인 '고귀한 왕관'(Keter Malkhut)은 운율이 있고 모든 절이 성경의 구절로 끝나도록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지혜를 찬양하는 성가이다. 이성에 근거한 사디야 가온의 철학은 마이모니데스 (Moses ben Maimon 1135-1204,보통 Rambam으로 부름)가 뒤를 이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모슬렘의 박해를 피해 모로코, 팔레스타인으로 전전하다 이집트에 정착했다.
'미시네 토라'(Mishneh Torah, 토라의 반복1166-1176)는 지금까지의 할라카, 율법의 집대성이며, '모레 네부킴'(Moreh Nevukhim, 당황한 자들을 위한 안내)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쓰여졌다. 그의 이성에 대한 우위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의 조화는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후 그의 책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 불살라졌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기독교 학자에게 철학적인 근거와 영향력을 줌으로 해서 그에 반대하는 논쟁은 끝을 맺었다. 그의 율법에 대한 정립은 지금까지 가장 권위 있는 율법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유대교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프랑스 출신으로 성경과 탈무드 주석의 대가인 라쉬(Rabbi Solomon Yitzhaki 1040-1105, 보통 Rashi로 부름)는 유럽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과 바벨론의 전통을 이어주었다. 스페인의 기독교 통치하에서 유대인은 많은 제약을 받았으나, 모슬렘이 스페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을 관대하게 대하자 유대인은 자유롭게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 카발라 (Kabbalah), 신비주의의 발생

카발라는 전통(傳統)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로 '전통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원래 카발라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종교적인 가르침을 말하나, 특별히 11세기 이후의 유대교의 신비적인 사상을 지칭한다.
유대교 내에 신비주의 운동이 처음 나타난 것은 주전 2 -1 세기였다. 쿰란의 사해 사본 중에도 신비주의 전통과 관계된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주후 2세기 시몬 벤 요하이 학파는 '창조의 신비'(Maaseh Bereshit)와 '하나님의 수레에 관한 신비'(Maaseh Merkavah)를 다루고 있다. 마아세 베레쉿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의 신비를, 마아세 멜카바는 에스겔 1 장에서 에스겔이 본 환상의 수레에 대한 신비를 주제로 한다. '헤칼롯'(Hekhalot, 하늘의 궁전)문학은 이 신비주의에 관한 작품을 일컫는 말이다. 유대 신비주의는 성경에 근거한다. 모세, 엘리야, 엘리사가 행한 기적은 초자연적인 것이며, 현상적인 세계와 함께 초자연적인 세계에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메시야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세상은 악과 싸우고 있으며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 사변적이며 실천적이기도 한 성격을 띤 신비주의에 관한 주제는 탈무드에도 풍부하게 나타나지만, 탈무드 시대에는 이단과 회의주의자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널리 알려지는 것을 막고 소수에게만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 12세기 독일에는 카발라에 심취한 '경건한 아쉬케나지'(Haside Ashkenaz)라고 불리는 분파가 생겨났다. 13세기 스페인에서는 카발라 운동이 절정에 달하여 '조하르'(Zohar, 빛남) 라는 신비주의의 고전적인 일련의 작품이 생겨났다. 이 조하르는 6세기 이상 유대인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신앙은 고난을 견뎌 내게 한 힘이었다.

  • 거짓 메시야

카발라에 영향을 받은 샤브타이 쯔비(Shabbetai Tzevi 1626-1676)가 이끄는 메시야 운동은 17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했다. 중세는 유대인 박해의 시기였다. 탈무드는 불살라지고 유대교의 의식은 핍박을 받았으며, 유대인은 살던 마을로부터 쫓겨나곤 했다. 참혹한 유대인 학살 사건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다.(1648-1655) 1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고문을 당하고 죽어 갔으며, 3백 개가 넘는 유대인 마을이 회파되었다. 왜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에게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질문이 생겨났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곧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었다. 터어키에서 태어난 샤브타이 쯔비는 탈무드 교육을 받았으며, 카발라에 심취해 갔다. 그가 20세에 이르자 벌써 그를 따르는 소수의 무리가 생겨났다. 그의 헌출한 키와 잘생긴 용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그의 노래는 그의 추종자들을 매혹시켰다. 카발라주의자들은 1648년이 메시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라고 믿었다. 이 해에 바로 대 학살이 일어났다. 메시야 정신에 사로잡힌 샤브타이 쯔비를 반대하는 마을의 랍비들이 그를 쫓아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으나 그곳도 마땅한 곳은 아니었다. 그는 카이로와 예루살렘으로 옮겨 다녔다. 이때 대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라라는 소녀가 메시야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고 하자 그는 곧 사라와 결혼한다. 1644년 샤브타이는 나탄 벤자민 레비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예언자적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1665년 샤브타이를 메시야로 선포한다. 터어키로 돌아온 그는 열광하는 유대인의 환영을 받고, 암스텔담의 영향력 있는 랍비들이 그를 메시야로 고백한다. 함부르그의 많은 유대인은 그들의 재산을 처분하고 메시야가 거룩한 땅(Holy land)으로 갈 것을 준비한다. 샤브타이는 콘스탄티노플의 술탄이 그를 왕중의 왕으로 인정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 곳으로 갔으나 술탄은 그를 체포한다. 그의 추종자들은 샤브타이의 구금이 메시야가 겪어야 할 고난의 과정으로 여겼다. 감옥에 갇힌 샤브타이를 방문한 느헤미야 코헨은 그가 메시야가 아닌 것을 깨닫고 술탄에게 아마도 샤브타이가 오토만 제국을 전복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알린다. 술탄은 사람을 보내 그가 모슬렘으로 개종하기를 권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샤브타이는 1666년 모슬렘으로 개종한다. 샤브타이는 그의 개종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이었다고 공포하자, 많은 추종자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일부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야곱 프랑크가 이끄는 소수의 메시야 운동(Sabbatean)으로 발전한다. 샤브타이 쯔비는 1676년 속죄일에 죽었다. 이 거짓 메시야 운동은 유대인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일부는 새로운 신앙을 찾아 동부 유럽에서는 하시딤 운동이, 서부 유럽에서는 하스칼라운동이 생겨나게 되었다.

  • 하시딤 운동 (Hasidism)

이삭 루리아(Isaac Luria 1534-1572)가 이끄는 카발라 운동은 하시딤의 신조를 채택하여 그 가르침을 대중화시켰다.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 운동은 신비주의에 기초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이다.(주전 2세기 마카비 반란에 동참했던 하시딤이나 12세기에서 13세기에 존재하던 하시딤이 아님) 하시딤 운동의 대표는 바알 쉠 토브(Israel Baal Shem Tov c.1700 - 1760)로 사람은 모든 생각과 행위에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존재하며 하나님과 함께 모든 창조물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과업이다. 이러한 헌신은 기쁨과 무아경을 만든다. 하시딤 운동은 도브 벨(Dov Ber) ,잘만(Shneour Zalman 1747-1813) 의 제자에 의해서 '하바드'(Habad, 지혜, 이해, 지식의 히브리어 약자임)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하바드 운동은 종교적 체험에서 지적인 노력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원래의 하시딤 운동과 다른 점이다. 하바드 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나 특히 뉴욕, 캐나다, 이스라엘에서 활발하다. 뉴욕에서 포교하던 하바드의 최고 랍비인 멜루바비치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1993년 1월 메시야로 선포되었으나, 1994년 6월 92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죽었다.

  • 하스칼라(Haskalah 계몽주의)

유대인의 계몽주의는 중세의 금욕주의와 관념론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키는 휴머니즘을 이상으로 하여 18세기와 19세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계몽주의는 17세기 서구화된 네델란드와 이탈리야 유대인 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18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역사, 철학, 과학의 습득은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넓혀 갔다.  독일에서는 멜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5-1786)의 노력으로 계몽주의가 싹트게 되었는데, 그는 게토의 벽안에 갇혀 있던 유대인을 세속적인 유럽 세계로 이끌어 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관용이 포고되자 세속적인 교육이 유대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 작가는 활발한 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월간지 HaMeassef가 발행되었다.(1783-1829)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삶으로 그들을 제한하는 대신 주변의 세계와 융합하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다. 계몽주의는 유대 사상과 삶의 방식에 현대화를 촉구하여 이후 자유주의, 시온주의를 낳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