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지은이: 루스 실로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
  

  제1장. 지를 기른다
  1.'남보다 뛰어나게' 아니라 '남과 다르게'
  아인슈타인은 여덟 살 때까지도 저능아
  유태인 어머니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교육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영어의
'Jewish Mother(유태인 어머니)'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자녀들에게 배움의 필요성을 지겹도록 강조하는 극성스런 어머니'란 뜻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을
어머니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19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야곱은 유태인의 조상이다. 하나님이 후세에 유태인의 일상생활의 기본이
되는 십계를 가르치라고 모세에게 명령한 이 성경 구절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아주 부드럽게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매우 엄하게 이
말을 되풀이했다는 사실이다.
  이 일로 인해서 십계의 구상은 먼저 여성에게 전해졌고, 다음에 남성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랍비(유태교의 율법사)들은 생각했다.
  '야곱의 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이 감돌게
발음되는데, 이것으로도 짐짓 수긍이 간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먼저 듣게 된 여성은 그것을 가족들에게 전달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 어머니들은 여성이야말로 최초의 교육자이며, 자녀들은
가르치는 의무는 당연히 여성이 지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 바로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동양의 어머니들과 유태인
어머니들과는 약간의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이웃집 어린이가
피아노 레슨을 받는다거나 일류학교 진학을 지상목표로 삼는다고 해도 유태인
가정에서는 그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한 '남보다 뛰어나라, 남들을 앞질러라' 하고 어린이들을 달달 들볶지도
않는다. 일류학교이든 이류학교이든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대학은
어느 대학에 가야만 된다는 식의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엄마들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은 여덟 살 때까지 저능아였다'는 사실을 유태인 어머니들은 잘
알고 있었다.
  유태인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발견한 세계적인 물리학자이다.
그러나 네 살이 되도록 말을 못하자,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그를 '저능아'라고
체념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 들어가서도 생각하는 것이나 머리 회전이 늦었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아서, 1학년 때 담임선생은 '이 아이에게서는 어떤 지적 열매도
기대할 수 없다.'는 신상기록을 남겼다.
  또한 그가 학교에 계속해서 다닐 경우, 다른 학생에게 방해가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리만큼 아인슈타인은
저능아였다.

  다른 아이와 다른 점, 즉 개성을 중요시한다.
  내 여동생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늘 '너는 츠바이슈타인이야!'라는
칭찬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의 '아인'은 독일어로 'l'을 의미하고 츠바이는 '2'를 의미한다.
즉'아인슈타인 다음으로 머리가 좋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의미의 농담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들먹인 진짜 이유는, 커 가는 어린이에게는
저마다의 개성이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각자 타고난
개성에 따라 긴 안목으로 지켜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이다. 이것이 바로
유태적인 교육을 하는 어머니들의 교육방법이기도 하다.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다른 집 아이들과 똑같이 뛰어 놀고 함께
공부하면 행동하는 스테레오 타입(고정적인 틀)에 속해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어린이와는 어딘지 다른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성장하는 것이
좋은 장래를 약속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열을 다투는 경우 승자는 언제나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저마다 남과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모든 인간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경하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아인슈타인은 담임 선생으로부터 저능아 취급을 받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 다섯 살 때까지 유클리드, 뉴튼, 스피노자, 그리고 데카르트를
독파했다.
  후일 그는 '나는 강한 지식욕을 품고 있었다'고 지난 일의 일들을
술회했으리만큼 속마음이 꽉 차 있었지만, 그 당시 그의 심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그가 다른 어린이들과 똑같이 되기를 강요했더라면 그의
재능을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열세 살 난 딸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어학에 특히 재능이 있어서
모국어인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영어, 불어, 일어까지 자유롭게 구사한다.
  나는 그 아이에게 늘 '너는 어학에 재능이 있으니 통역관이 된다면 아주
좋겠구나'하고 부추켜준다. 대신 '너는 어학을 잘하니까 수학도 잘한다면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없겠지'라는 식으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유태인 어머니들은 예외 없이, 다른 집 어린이와는 무엇인가 다른
자기 자녀만의 특성을 찾아서 그것을 신장시켜 주는데 전력투구한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히브리'라는 말의 원래 뜻은 '혼자서 다른 쪽에
선다'이다. 자기만의 개성을 충분히 키워준다는 것은 유태인의 생활방법 전반에
걸친 원칙인 셈이다.

  2.'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성적인 어린이는 잘 배우지 못한다
  동양의 어머니들은 대개 '댁의 아이들은 어쩌면 그렇게 얌전하고 착한
가요?'라는 말로 칭찬하기 일쑤인데, 유태인들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 집 아이들이 만약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나는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얌전하다, 착하다.'라는 말은
'진취성이 없어 공부를 잘할 수 없다'라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속담에 '내성적인 어린이는 잘 배우지도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성적인 아이는 공부를 잘 못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수줍음을 잘 타서
남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성격이라면 참다운 학문을 깊이
터득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는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닥치는 대로 질문하도록 길들여져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러시아 문제 연구가이고, 러시아혁명사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진 폴란드
태생의 아이자크 도이처는 불과 열세 살에 랍비가 될 만큼 천재소년이었다.
그가 부모로부터 지겹도록 들어왔던 충고는,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하고
할말이 정해졌다면 똑바로 서서 큰 소리로 분명하게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랍비'의 자격을 얻기 위하여, 겨우 열세 살의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거리의 많은 군중 앞에서 장장 두 시간에 걸친 대 연설을
했다. 청중은 어린 소년의 말이지만 완전히 매혹되어 감동 어린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조리 있는 연설을 들은 약 1백여명의 랍비들이 논의한 결과 그는
랍비에 임명될 수 있었다. 유태인 사회에서 제일 존경받는 대상인 랍비가
되려면, 내성적이거나 얌전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덕이자 절대적인 조건이다.
  내가 동양사람과 이야기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대화 도중에 곧바로
침묵이 찾아오는 일이다. 사실 나는 유태인으로서는 그다지 수다쟁이가
아닌데도 나 혼자만 계속 지껄이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나는 말에 의해서 배우는 것이 어려서부터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에, 침묵이란
배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식에
대한 욕구의 결여라고 생각한다.
  매사를 분명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남에게 '나는 진정 배우고 싶다'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듣기만 한다면 앵무새가 될 뿐이다
  나는 언젠가 어느 동양인 엄마에게 '당신은 자녀가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무슨 말을 해서 보냈습니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엄마는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돼요,라고 했지요"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교실에서 하나같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을 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라 정말 안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수업방식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그냥 일방통행
식으로 듣게 할뿐이고, 선생님의 말이라면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고 무조건
따르다 보면 독창성이 없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태인의 교육은 다르다. 유태인 엄마들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의심나는 것은 주저하지 말고 물어봐야 돼요'라고 일러서 보낸다.
  어린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암기가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문제를 내고 학생들은 그것을 풀면서, 의심나거나 모르는 점은
끝까지 질문하도록 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것이다.
  유태인의 성전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의 말이 있다.

  교사는 혼자만 알고 떠들어대서는 안 된다. 만약에 학생이 잠자코 듣기만
한다면 많은 앵무새를 길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교사가 이야기하면
학생은 그것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건 교사와
학생 사이에 주고받는 말이 많이 오가게 된다면, 교육효과는 그만큼 커지기
마련이다.
  내가 알고 있는 랍비 중 한 사람인 마빈 토케이어 씨는 <일본인과
유태인>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유태 붐을 타고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어, 일본의 여러 지방에서 초청을 방아 강연을 하러 다녔다. 그런데
그는 그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열띤 강연을
끝내면 청중들은 박수만 쳤지, 누구 한 사람 강연한 내용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침묵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태인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유태인의
모임이라면 이런 초청강연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연자가 쩔쩔맬 정도의 질문이
사정없이 날아드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연 내용을 되풀이 질문함으로써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끈질긴
탐구욕인 만큼,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학습법이 아닐까?

  <탈무드>가 가르치는 두 가지 학습법
  <탈무드>에 유태인의 탐구욕에 대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나그네가 있었다. 두 사람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길을 걷다가 외딴집을
찾아냈다. 그 집안은 텅텅 비어 있었는데, 다행히 높은 천정에 과일이 들어
있는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어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그러자 한 사나이가 벌컥 화를 내면서 집에서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남은 한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꼼짝하기 싫을 만큼 허기진
상태였지만 그는 그 바구니를 보고 '이는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는 힘을 내어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사다리를 찾아냈다.
그러고는 사다리로 올라가서 과일이 든 바구니를 내려 맛있게 먹었다.

  유태인이라면 언제나 후자의 방법을 모범으로 삼는다. 뭔가 잘못되었을 경우,
자신의 눈앞에 있는 물건에 가만히 손만 내밀 뿐 그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짓은 절대로 사절한다.
  말하자면 유태인의 어린이들은 자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과일을
손에 넣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경우, 사다리를 찾아 한 칸씩 타고
올라가 기어코 과일을 손에 넣듯이, 한 가지씩 질문을 하면서 문제를 풀어 가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배움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유태인이 많은 것을 발명하고 항상 지적인 개척자의 지위를 지켜온 비결은,
오랜 옛날부터 이런 방법으로 교육받아 왔고 도전적인 질문을 그치지 않는
자세를 몸에 익혀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적인 지의 체계화를 서서히 이룩하고,
그것이 곧 위대한 업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이 많은 것을 발명하고 항상 지적인 개척자의 지위를 지켜온 비결은,
옛날부터 도전적인 질문을 그치지 않는 자세를 몸에 익혀왔기 때문이다.


  3.머리를 써서 일하라
  머리가 좋아지도록 만들어진 교육환경
  사람들은 대체로 '유태인은 머리가 좋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미국에서 아이비 리그(동부지역 명문대학군)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하버드,
예일, 칼럼비아, 프린스턴 등의 일류 대학교수진의 30%가 유태인이라고 한다.
또 1905년부터 1973년까지의 노벨상 수상자 310명 중 유태인이 43명으로, 전체
수상자의 10% 이상이 유태인이거나 유태계라고 한다.
  물론 이런 사실들이 곧 유태인은 선천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능의 우열은 결코 인종과 민족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유태인은 어려서부터,
유태인답게 살아가려면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머리를 써서, 즉 두뇌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일해야만 된다고 항상 배워왔다는 사실이다.
  또 유태인이 어려서부터 받아온 학교나 가정교육 시스템은 머리 쓰는 일에
알맞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유태인에게는 아주 자연스런 일로
인식되어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활 환경 모두가 머리 쓰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통계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유태인이 육체노동을 천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시에 두 초등학교를 다닌 토케이어 씨
  마빈 토케이어 씨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1936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동시에 두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침 여덟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는 미국 초등학교에 다니고,
이곳에서 수업이 끝나면 버스로 40분이나 걸리는 다른 학교로 달려가야 했다.
그는 그 학교에서 네 시간 동안 히브리어를 사용하며 유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두 학교를 다닌 습관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 반까지는 미국인들의 학교에 다녔고, 그 수업이 끝나면
다시 유태대학인 예시버 대학엘 다녔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케이어 씨는 힘은 들었지만 동시에 두 개의 대학 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 밖에도 그는 스포츠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었는데, 특히 야구를 아주
잘해 대학팀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뛰어난 소질을 발견한 어느
프로 야구팀에서는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손가락
모양이 특이해서 직구를 던질 때도 자연스럽게 공이 처져서 아무리 잘 치는
타자라도 여간해서는 홈런을 칠 수 없는 변형 구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프로 야구단의 입단 교섭에 마음이 쏠려 아버지와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아버지는, '야구도 좋지만 그것은 네게 적당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고
충고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두 학교에 다녔을 만큼 머리
쓰는 일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선천적으로 특이한 '황금
손가락'을 가진 그였지만 빈틈없는 두뇌 교육과정을 밟아온 그에게 프로
야구선수라는 직업은 아무래도 적합치 않다고 그의 부친은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프로 야구팀의 유혹을 뿌리치고 랍비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머리를 써라'
  이는 어느 유태인 어린이건 간에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항시 듣는 말이다.
또한 유태인 엄마들은 어린이를 꾸짖고 때릴 일이 있으면 뺨을 때릴망정 절대로
머리는 때리지 않는다고 한다. 뇌가 상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게다.
  그러므로 유태인의 머리가 좋은 것은 선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머리를
잘 쓰는 방법을 어릴 적부터 훈련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라면 누구나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
  그런데 똑같이 머리를 쓰는 방법이지만, 직접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과 지식을
터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후자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태인의 속담에 '물고기를 한 마리 준다면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면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고기'를 '지식'이란 말과 바꿔놓고 본다면 이 속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만이 우리 어른들의 임무는 아니다. 그와
더불어 배우는 방법까지도 가르쳐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부모들은 대부분 어떤 일정한 양의 지식을 학생들 머리
속에 넣어주고, 어떻게든 시험에 통과하는 능력을 불어넣어 주기를 요구한다.
즉 대부분의 부모들은 상급학교에 입학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어떻게 물고기를 잡을 것인지는 가르치지 않고,
당장에 먹을 한 마리의 물고기를 나눠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보다는 지식의 체계를 어떻게 자기 것으로 흡수하느냐 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되면, 학생들은 그것을 다른 일에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학문에 대한
흥미를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학교 교육에는 문외한인 나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유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리포트를 제출시킬 경우,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그 수집된 자료들을 적절히 종합, 분석, 정리해서
자신의 머리로 리포트를 작성하게끔 이끌어준다. 그리고 리포트의 평가 기준은
그 내용이 아니라, 자료를 다룬 솜씨가 중요 포인트가 된다.
  이렇게 유태 아이들은 최대한 머리를 활용하는 환경 속에서 길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물고기를 한 마리 준다면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4.지혜가 뒤지는 사람은 매사에 뒤진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의지할 것은 오직 지혜뿐
  유태인의 격언 중에, '만약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남고 싶다면 먹는
것으로도, 마시는 것으로도, 춤을 추는 것으로도, 또는 일하는 것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지혜를 가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유태인은 그야말로 온갖 박해를 받으며 생존해
왔다. 그런 유태인에게 만약 지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중세 유럽 시대의 유태인은 토지의
소유를 금지당했고, 직능별 조합인 '길드'에마저 가입할 수 없었다.
  유태인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은 오직 의사나 상인뿐이었다고 한다. 고등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어 편히 살거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지혜를 터득해서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길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전 <탈무드>에는 '유태인의 유일한 재산은 지혜'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우화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한 가지를 들어보자.

  거부들만 타고 있는 배에 '랍비' 한 사람이 편승하고 있었다. 부자들이
서로의 재산을 비교하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랍비'가 말했다.
  "가장 유복한 사람은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서는
보여드릴 수가 없군요."
  그로부터 얼마 후, 해적의 습격을 받게 되어 부자들은 가지고 있던 재물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마침내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그는 학생들을 모아 학교를 만들었다. 그러곤
단번에 거부가 되었다. 함께 배를 타고 왔던 부자들은 이미 빈털터리 거지가
되어 있었는데, 그제야 비로소 '랍비'가 한 말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혜가 뒤지는 사람은 매사에 뒤진다'라는 속담처럼, 지혜를 갖지 못한 자의
부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지혜 있는 자 모든 것을 갖춘 자
  다음의 이야기는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유태인은 지혜를 갖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거침없이 버리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유럽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 사이에 미국으로의 이민운동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독일 바바리아 지방 바이에르스 돌프촌에 파니
셀리란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자녀들을 부자유스런 생활환경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 보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 기초작업으로
장님인 조세프를 대학에 진학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직공생활을 하고 있던
남편 데비드는 그럴 만한 돈이 없다며 반대했다.
  하는 수 없이 파니는 그 동안 남모르게 모아두었던 돈을 털어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조세프를 에드란켄 대학에 입학시켰다. 대학에서 그는 그리스어, 영어,
프랑스어를 익힌 결과 이미 알고 있던 독일어, 히브리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조세프는 졸업 후 17세가 되던 해에 '약속의 땅'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
그의 주머니 안에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미국 지폐 1백 달러가 전부였다.
  조세프는 그 후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뉴욕에 'J&W 셀리그먼 컴퍼니'란
은행을 설립하고 어학 실력을 마음껏 발휘, 국제 금융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고,
이민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셀리그먼 산(Mount Seligman)'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그의 모친 파니가 교육이라는, 즉 어학이라는 '지혜'를 터득케 해서
조세프를 신대륙에 보낸 결과였다.
  이렇듯 유태인들은 '지혜가 뒤지는 사람은 매사에 뒤진다'라는 속담과 '지혜
있는 자 모든 것을 갖춘 자'라는 격언을 굳게 믿고, 어린이들을 그렇게 되도록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이 세상에서 진정 살아남고 싶다면 먹는 것으로도, 마시는 것으로도, 춤을
추는 것으로도, 또는 일하는 것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지혜를 가져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

  5.배움은 벌꿀처럼 달다
  즐거움을 못 느끼는 동양식 교육
  어린이가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책임의 태반은 어른인 부모에게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학교나 유치원은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당연히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의무인 만큼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공부이고, 또한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곳이 학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공부를 좋아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이 싫다'고 고개를 적으면, 어른들은 대개 '공부를 안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강요만 한다. 이렇게 되면 어린이는 더욱 공부가
싫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유태인의 눈에는 이런 일들이 이상하게 보여진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본디 인간에게 있어서 배운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즐겁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의무교육으로 하고
있는데, 그 부모들이 이 '의무'란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여기서의 '의무'는, 부모가 어린이를 교육받게 할 의무인지는 몰라도,
어린이가 '좋은 성적을 올릴' 의무는 아닌 것이다.

  배움이란 '꿀처럼 달고 맛있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
  유태 초등학교에서는 공부란 '꿀처럼 달고 맛있는 것'이란 사실을 어린이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교육시킨다. 이스라엘서는 초등학교 신입생이 선생님과 처음
만나는 등교 첫날, 공부란 '달콤한 꿀과 같다'는 사실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준다.
  선생님은 1학년 학생들 앞에서 히브리어의 알파벳 22자를 벌꿀이 묻은
손가락으로 써나간다. 그러곤 '이제부터 너희들이 배우는 것은 모두 여기 쓴
22자에서 출발하게 되며, 더구나 그것은 벌꿀처럼 달고 맛있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또 신입생 모두에게 케이크를 주는 학교도 있다. 흰 설탕이 덮인 맛있는
케이크 위에는 히브리어 알파벳이 역시 설탕으로 씌어져 있다. 어린이들은
선생님에게 이끌려 설탕의 알파벳을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면서 단맛을 빨게
된다. 이 역시 '배움이란 꿀처럼 달다'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좋은 방법이다.
  외국에 있는 유태인 학교 입학식 때에는 알파벳 대신 유태민족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그린 케이크를 나누어준다. 그리고 학생들은 '별'을 그린
손가락을 빨아가면서 배움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아이로 하여금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공부이고,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곳이 학교라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하려면, 배움이 달콤한 꿈과 같다는
지혜를 터득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6.싫으면 그만 두라, 그러나 하려면 최선을 다하라
  '무엇이 되라'는 식의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유태인 부모들은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서 엉뚱한 꿈이나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예를 들어, '너는 앞으로 의사가 될 각오로 공부하라'는 식의
말은 결코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공부를 잘하라고는 말하지만, '의사나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잘하라는 것은 아니다. 학문 자체가 목적이지 수단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장래의 선택은 어린이 자신들의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어른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부 이외의 어떤
예능이든, 전혀 강요하거나 권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하면 가르치고, 싫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즉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가르쳐야 되겠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싫은 것은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라'는 것으로 족하다. 만약 어린이 스스로
선택해서 하고 싶다고 할 때는, 그렇게 하기 위해 후회 없는 노력을 하라고
충고해 줄뿐이다.
  이처럼 어린이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어버이가 멋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
유태인 부모들의 교육 방식이다.
  러시아계 유태인으로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영화음악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부친은, 아들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간청하자 이웃에 사는 한 여선생에게 1시간에 1달러씩 주기로 하고 레슨을 받게
했다. 레너드는 뜻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병약한 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의지로써 그것을 극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용돈을 아껴 레슨비를
내면서까지 열심히 배워 마침내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흥미 있는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일곱 살 때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레슨
시간이 길고 지루해서 1년만에 집어치웠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아인슈타인이
처음 바이올린을 시작했을 때 강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번에도 그만두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 후 2-3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모차르트 곡을 연주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 아인슈타인은 다시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평생 바이올린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린이는 스스로의 능력을 끝까지 추구한다
  어린이는 부모들이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 주면, 공부를 할 때도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의욕을 갖게 된다.
  그 한 가지 예로,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는 열 살 때부터 남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선생님도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를 들고 나와
선생을 곤경에 빠뜨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렇듯, 자기 자신의 능력을 추구하는 데 지나치리만큼 열성적인 유태
어린이들은 부모의 희망을 받아들일 때도, 자기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유명한 정신의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열 일곱 살 나던 해에 빈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의학부에 적을 두었지만, 개업의사가 되는
것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곤 13년 동안 연구실에 틀어박혀 과학으로서의
의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유명한 정신분석학도 결국은 개업의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 추구에 열중한 결과였으리라.
  우리는 어린이들의 장래에 대해 지나치게 기대감을 갖거나, 꿈을 그리는 식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월권행위가 아닐 수 없다. 어디까지나 어린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능력에 의하여 인생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만이 최선의 결과를 얻는 방법인 것이다.

  7.아버지의 권위는 자녀들의 정신적 기둥
  아버지의 권위가 절대적인 유태인 가정
  유태인 사회는 부계 사회이다. <탈무드>에 부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아버지가 먼저 등장하고, 어머니만 등장하는 경우는 한 군데밖에 없다.
  이 성전에는, 부모가 함께 물을 요구할 때는 아버지에게 먼저 가져가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먼저 가지고 가더라도 어머니는 남편인
아버지를 존중하기 때문에, 결국은 어머니 손에서 아버지 손으로 건너가고 말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히브리어로 아버지는 '교사'라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다. 이렇듯 유태인들에게 있어 아버지의 권위는
자녀들에게 마음의 기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역시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로 인해 성공한 사람 중하나이다.
  그는 어렸을 때 수학 성적이 아주 형편없어 낙제까지 한 적이 있었다.
보다못한 담임선생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러는 공부를 시켜봐야 별 수 없을
것 같으니 차라리 양화점 견습공으로나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런 권고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계속 학교에 보내
수학공부에 전념케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태인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인 만큼, 아들러도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아들러는 수학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 날,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어려운 문제를 칠판에 써놓고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누가 이 문제를 풀어볼까?"
  그러자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아들러가 대답했다.
  "제가 풀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열등생인 아들러는 도저히 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러는 클래스메이트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문제를 손쉽게 풀어나갔다.
그 뒤로 그는 수학 성적에서만큼은 클래스에서 손꼽히는 존재가 되었다.
  아들러는 나중에 심리학의 새로운 체계를 이룬 ' 개인심리학'을 내놓아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저명한 정신분석학자가 되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권위가 사람을 만든다
  요즈음 동양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잘 아는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은 탄식조의 넋두리를 하곤
했다.
  "우리 집에서는 내 말이 전혀 먹혀들지 않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내들은 남편을 단순히 돈이나 벌어들이는,
이를테면 '꿀벌' 같은 존재쯤으로 여긴다. 그뿐 아니라 어린 자녀들 앞에서도
그런 내색을 감추지 않는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어린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아비를 지도자로서, 가장으로서 존경할 뿐 아니라 어떤 일이건 최종
결정권을 남편에게 맡기는 유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를 더없이 존경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갖게 되고, 또한 이것이 유태인 가정에 흐트러짐
없는 정연한 질서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항상 이상적인 아버지 상을 추구하면서 자아 형성을 도모하게
마련이다. 미국의 유태계 작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는 이런
부자관계가 농도 짙게 그려져 있다.
  아버지의 정사와 아들의 사업상의 실패가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 희곡은,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
  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있어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미움의 감정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핵심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버지의 권위가 유태 어린이들을 정신적으로 조리 있는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이 포인트!
  아버지를 더없이 존경하는 어머니를 보고자란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태인 가정에 정연한 질서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이다.

  8.'배운다는 것'은, 배우는 자세를 '흉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버지가 기른 키신저 외교
  유태인의 성전인 <탈무드>에서는 '돈을 빌려주는 것은 거절해도 되지만 책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거절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유태인들이
독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일본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랍비'인 토케이어 씨는 한가한 시간이면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데, 이제 겨우 다섯 설인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흉내를 내면서 '공부하는 척'을 한다고 한다. 아이는 서재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꺼낸 다음 의젓하게 앉아 페이지를 넘기면서 눈을 치켜 뜨는 아버지의
폼을 흉내낸다. 물론 아직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내용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아버지란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관념이
어린 그의 가슴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그의 정신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책 읽는 모습을 흉내내면서 성장한 어린이 중에 세계적인 명사가 된
사람이 있다. 그는 유태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의 직위에까지 오른 헨리
키신저 박사로서, 그는 어렸을 때 매일 아버지와 함께 공부를 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 루이는 독일 여학교 교살로 재적하고 있었는데, 그의
일가가 살던 아파트는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화려한 기록을 남긴 키신저 외교의 이면에는 19세기 유럽 외교사에 대한 그의
넓은 지식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 정설인데, 그가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그를 깊은 학문 속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린이들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른들을 '흉내내다'
  일본어로 '배운다'의 어원은 '흉내낸다'와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서 나는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방법이 우리들 유태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운다는 것은, 흉내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유태인과 일본인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아버지들은 어린 자녀들이 흉내내도
좋을 만큼 모범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따금 일본인 가정에 초대되어 그들
생활의 단면을 보게 되는데, 아버지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전용 책상이나 책꽂이조차 없다는 것은 유태인의 눈으로 보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회사나 바깥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에서까지
책상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자녀들한테는 '공부하라'고 강요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넌센스가 아닌가.
'아무리 공부를 하라고 타일러도 우리 애들은 통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아야'라고 탄식조로 말하는 아버지, 그 탄식은 자녀들이 흉내낼 만한 아버지
상을 가지고 있지 못한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교육은 모방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부모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지 않고서는
자녀들의 올바른 성장과 발전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9.배움을 중지하면 20년 배운 것도 2년 내에 잊게 된다
  돈은 빌려주지 않더라도 책은 빌려줘라
  유태의 속담 중에 '현인은 없으나 현명하게 공부하는 사람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한평생 배우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유태인이 지닌 인간에 대한 기본 시각이다.
  아무리 지혜가 풍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배움을 중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년 걸쳐서 배운 것을 2년 내에 잊어버린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배움을 중지하면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을 한순간에 모두 잃게 된다.
  인간에게 '현인'이라든가, '어리석은 인간'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배우고 있느냐', '배우지 않느냐'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즉 '배우지 않는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성서 신명기 6장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라는 구절이 있다.
  이 성경 구절 가운데 '마음에 새기고'란 말은, 히브리어로 '조각하다'라는
의미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자녀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먼저 배우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즉, 매일 매일 배우는 일에 정열을
쏟음으로써 비로소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녀들의 모범적인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탈무드>의 율법이 말하고 있듯, 책이란 만인의 공유물이며, 만인은 배울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탈무드> 한 권을 읽으면 축하파티를 ...
  '책의 민족'이라고 불리는 유태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이 있다.
  유태인 비지니스맨들 중에는 아침 통근차 안에서 <탈무드>를 공부하고
퇴근길에도 <탈무드>를 읽으며, 안식일에는 마음놓고 몇 시간씩 <탈무드>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한평생을 다 읽어도 읽지 못할 책이지만,
한 권이라도 독파한다는 것은 우리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인 것이다.
  한 권을 독파하면 친척과 친구들을 불러다가 축하파티를 열 정도로 유태인은
학문에 대한 정열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생각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나로서는 동양인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배움을 멀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대학생의 경우에도, 입시 관문을 뚫고 난 다음에는 해방감에 사로잡혀
스포츠나 오락 따위로 세월을 보내는 학생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배움을 직업을 얻거나 결혼을 위한 패스포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어, 비싼 등록금을 주고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학문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인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부모들이 어린이 교육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 잃은
학문을 자식을 통해 되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갖게 된다.
그러나 배우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는 부모가 자녀들의 장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포인트!
  배우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는 부모가 자녀들의 장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10.상상력에도 한계는 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란다
  어린이들이 가장 호기심을 갖고 있음에도 도저히 이해시키기 어려운 관념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이다. 예를 들어, 가까운 친척이나 어른들이 죽으면
어린이들은 그 이유를 물어본다.
  "왜 죽었어요?"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대답할 말이 없다. 젊은 나이에
죽었을 경우에는 '응, 큰 병이 들었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그게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다시 추궁한다.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응,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란다."
  유태인은 저승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어린 자녀들에게 들려주려 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의 상상력은 그들 자신이 자유롭게 펼치거나 비약시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부모들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앞의 예처럼 대답할 수 있지만, 어린이들이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그런 관념,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답하는
각도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 딸이 세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딸아이가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마마, 하느님이 뭐야?"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지. 공기 속에도 계시고, 우리가 먹는 과일
속에도 계시고, 또 ..."
  그러자 딸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야, 나 하나님 먹는다'하고는 무슨
보물이나 얻은 듯 뽐내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무리하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사고의 방향을 잘못 잡아 어린이들의 미숙한 상상력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단계로까지 어버이 멋대로 이끌어 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항상
명심해야 될 것은 첫째, 어린이에게는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둘째,
어린이에게는 절대로 공포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인 부모들은 '하나님은 저 어딘가에 살고 계시단다'라는 식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쁜 짓을 하면 하나님이 오셔서
혼내주신다'라는 공포감을 자아내는 말도 하지 않는다.
  심한 자극은 어린이에게 해롭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어려운 관념에 대해 질문하는 어린이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 명료하게 대답해 주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그 근원을 캐어보면 그러한
전통이 구약성서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매우 간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향년 175세다.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사후의 거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신에 아브라함의 업적과 가르침이 '그
열조(백성)에 돌아가니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다'라는 뜻이다. 죽음이라든가
하나님에 대해 억지로 꾸며내거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어린이들을 일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어린이들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린,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흐려놓는다면
어찌되겠는가.
  유태인들은 업무에 골몰한 나머지 가정을 내팽개쳐 버릴 정도의 주관적
자세를 싫어하며, 식욕, 성욕, 음주, 금전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탐하지 않는다. 이런 성격은 관념이라는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자극을 주거나 흥분을 자아내는 것들은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 부모들은 어린이의 상상력을 무시한 지나친 요구를
절대 하지 않으며, 적당한 자극을 통해 어린이의 마음을 단계적으로 개발시켜
줌으로써 구김살 없이 키우려는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것이 포인트!
  어린이에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관념에 대해 얘기할 때는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절대로 공포감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11.추상적 사고는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신은 언제나 추상의 영역에 있다
  유태민족 중에는 높은 추상적 사고력을 요구하는 학문과 사업부문에 종사하는
인물이 많다.
  이론물리학자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심리학자로는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있다. 비지니스에서도 실제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금융, 유통에
관계되는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다.
  뉴욕 금융의 중심지인 월 가의 금융브로커 중 과반수가 유태인이라고 하며,
미국인이 소매상점에 지불하는 총 금액의 17%를 좌우하는 카탈로그 판매회사인
시아즈 로바크도 유태인이 경영하는 회사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유태인이 추상 능력에 뛰어나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는 어릴 적부터 '추상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습관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은 어떠한 우상 숭배도 거부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의 그림이나 조각 등은 너무나 많다. 말하자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추상이 아닌 구상인 만큼 언제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태교에서는 인간과 똑같이 그려진 예는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추상의 영역 속에 존재하며 그런 까닭에 유태인은 항상 '구상화될 수
없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훈련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것이 사물을
논리적, 추상적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유태인 어린이들이 자주 듣는 이야기 가운데 최초의 유태인인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부친이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브라함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어린 나이의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만든 우상을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섬기며
사는 것이 이상하기 작이 없었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아브라함은,'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 하나님일 수 없다면 하나님은 우상이 아닌 다른
것, 혹은 태양일지도 모르며 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태양은 해가 지면 사라져 버리고, 달은 날이 밝으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태양이나 달과는 다른 더 멋진 존재가 틀림없으리라는
결론 내리기에 이른다.
 
  왜 '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까?
  이로써 아브라함은 유태인의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추상적
영역에서 이해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날 많은 유태민족의 어린이들에게 훌륭한
교훈이 되고 있다. 즉, 유태의 어린이들은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애써만든
우상을 모조리 파괴하면서,'우상이란 말도 할 수 없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걸어다닐 수도 없는데 어째서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왜 우상을
숭배하고 절을 합니까? 우상에게 예배하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하고
반박하는 내용을 통해 하나님이란 실체가 아닌 추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상상력의 확대를 통해 아이들의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교육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만도 아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수학
공부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학령기 이전에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12.어머니의 과보호가 때론 아이의 독창적인 재능을 살릴 수도 있다.
  과보호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유태의 격언에,'하나님을 언제, 어디에나 계신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머니로 만들었다'하는 말이 있다.
  아버지가 한 가정의 지도자인 것은 틀림없으나, 어머니의 애정은 자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못지않게 절대적이다 때로는 애정이 너무 지나쳐 '유태의
어머니'라는 말이 마치 과보호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랍비' 요셉은 이러한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났는데, 자기 어머니가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성령이 가까이 오시는
구나, 빨리 일어나야지'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탈무드>에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과보호는 어린 자녀들의 장래를 그르친다는 것이 통상적인
관념이어서, 응석을 부리는 아이를 보면 '엄마가 귀엽다고 떠받들어주었기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리에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과보호가 반드시
어린이의 성격형성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부모의 과보호가
어린이의 독창적인 재능을 개발시킨 사례도 흔히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유태계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는 대단한 응석받이로 자라났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을 보라고 하면 신경질을 부리면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가 열세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의 엄마가 물었다.
  "너에게 가장 비참한 일은 무엇이냐?"
  그러자 프루스트는 '엄마와 헤어져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서른세 살 때까지 편지의 첫머리에 '진정으로 좋은 어머니'라고 썼을
정도로 응석받이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어머니에게
안부전화를 한 것은 그다지 신가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프루스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머니와 나는 언제나
무선전화로 연결되어 서로 곁에 있건, 멀리 떨어져 있건 항상 긴밀하게 마음이
오가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적혀 있을 만큼 마치 연인들
사이에 오가는 러브레터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프루스트는 이렇듯 어머니와 친밀하게 지냄으로써 다른 어린이들과는 전혀
다른 감성의 소유자로 자라날 수 있었다. 대학 예비학교인 리세에 다닐 때도
방자하리만큼 무분별한 행동을 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프루스트는 마치
여자처럼 차분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이런 차분한 성격이 그의 문학적
소양과 연결되어 만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명작을 쓰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과보호로 성공한 위인들
  프루스트뿐 아니라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도 과보호라 할 정도로 어머니의
'열정적인 애정'의 비호 밑에서 성장했다.
  <꿈의 해석>으로 유명한 프로이트는 어렸을 때,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기묘한
새를 닮은 남자들이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대드는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워낙에 특이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그가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열정적인 애정이 밑바탕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과보호는 확실히 어린이의 정신적인 균형을
무너뜨리지만, 한편으로는 독특한 재능을 최대한으로 키워주는 초석이 되기도
한다.
  개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유태의 어머니들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기보다는 개성이 뚜렷한 어린이가 되는 쪽을 바람직스럽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호를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푸르스트 등의 예에서처럼
어린이에 대한 어머니의 과보호가 결코 나쁘다고만 단정지을 일도 아닌 것
같다.

  이것이 포인트!
  프르스트,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의 성공 뒤에는 과보호라 할 정도로 열정적인
'어머니의 애정'이 숨어 있었다.

  13.형제간의 두뇌 비교는 둘을 다 해치지만, 개성의 비교는 둘을 다 살린다.
  키신저 형제의 건전한 라이벌 의식
  유태인들은 형제 자매를 서로 다른 인격체로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형과
동생을 비교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형은 저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너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 모양이니?"
  이런 식으로 형제간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동생에게 어찌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셈이 되고, 그렇게 따진다고 해서 동생의 성적이 오를 리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를 점점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형과는 개성이 다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싹마저 자르는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다시 말하면 형제를 한 가지 능력, 예컨대 학교 성적만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해독만 끼칠 뿐 아무런 이득이 없다.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의 동생 월터 키신저는 언젠가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우리 형제는 라이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엇나간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둘은 성격이 달랐고, 커서는 직업도 전혀
달랐다."
  이는 유태인인 부모로부터 서로 다른 인격체로 인정받은 결과였다. 월터
키신저는 앨런 전기회사 사장으로서 형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존경받는
비지니스맨이 되었는데, 그는 형에게 열등감을 갖기는커녕 '신문사는 헨리의
뒤만 쫓는데, 내가 업계에서 성공한 비화도 탐색할 만한 가치가 있지'라며
건전한 라이벌 의식을 강조했다고 한다.
  비록 형제간이라고는 하지만 각기 다른 인격체라는 사고방식은 유태인에
있어서는 실로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신명기 24장에, '아비는 그 자식들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은 그 아비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가족 전체가 벌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그 당시에도 유태인들은 개인의 책임을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비록 한 가족이라 하더라도 개인이 우선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형제가 함께 어울리면 서로의 개성을 기를 수가 없다
  유태인 부모들이 자식들을 대할 때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 사이의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각각의 개성'이며, 서로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자식들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결코 형제를 함께
보내지 않는다. 서로간의 취미가 다를 것이므로 같은 장소에 가기보다는 각자
다른 장소로 가서 서로 다른 세계를 접하는 편이 그들의 장래에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태인들의 형제 자매가 우애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이 그들의 관계를 느긋하고 경쾌한 관계로 만들어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배려하기 때문이다.
  유태인 출신의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과 잡지 편집인인 샤리버튼 형제의
우애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처음으로 가졌던 책은 누나와 형이 준 몇 권의 컬러북이었는데, 그는 나중에
'만약에 나를 다시 한 번 파리로 보내준다면 책을 사기 위하여 내 헌 옷을
팔아서라도 세느 강가를 헤매련만 ...'하고 술회했을 정도로 억척스러운 책
수집광이 되었다.
  유태인들은 자식들이 각자 개성에 따라 성장하는 한편,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평생 유지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형제간의 두뇌와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각기 개성이 다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싹마저 자르는 결과는 낳기 십상이다.

  14.외국어는 어릴 때부터 습관화시킨다
  동양인들은 왜 외국어에 약한가
  내 친구의 남편 중에 일본인 행세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일본인을
가장해서 일본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면 상대방이 전혀 유태인이라고 눈치채지
못하리만큼 그의 일본어 발음은 정확했다.
  보통 외국인이 일본말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모국어의 악센트를 감출 수가
없는데, 그는 5개 국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일본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뿐만이 아니라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2개 국어 이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유태인이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널리 흩어져
살고 있고, 오랜 세월 박해를 받아 각 나라를 떠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국어를 잘하는 친척들이 자주
드나들다 보니, 유태인들은 어릴 적부터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유능한 '언어 학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필수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나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동양인을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시가가 너무 늦은 탓이 아닐까?
  외국어는 가능하다면 어릴 적부터 가르쳐주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젖먹이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라는 얘기가 아니다. 아직 말을 배우기
전이라도 음악을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려주라는 것이다. 언어란
말하기보다는 듣고 이해하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유태인들은 대부분 그들이 처한 특수한 환경 덕분에 최소한 몇 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이 책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마잘
토케이어 씨는 모국어인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아라비아어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현재 이스라엘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데,
그는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아르메니아어, 영어까지도 능통하게 구사한다고
한다.
  또한 마잘의 남편은 그 외에도 독일어와 스페인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고, 나
역시 히브리어, 영어, 헝가리어, 이디슈어(독일어와 히브리어 등의 혼성어),
그리고 프랑스어도 조금은 한다.
  나의 남편도 이디슈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들어서 좋지 않은 말을
할 때는 둘만이 통하는 이디슈어로 얘기한다.

  어학에 능통했던 프로이트
  프로이트 역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고
한다. 전기 작가 라시엘 베이커가 쓴 <프로이트의 사상과 생애>에는,
프로이트가 겨우 열 살 때 라틴어의 의미변화와 그리스어의 문법을 외우기
위해서 벽을 두드리면서 방 안을 빙빙 돌아다녔다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어를 자주 접하는 유태인들은 단일어만 쓰는 사람보다
언어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발음도 1개 국어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원어에 가까운 발음을 습득할 수 있다.
  그런데 동양의 언어는 구라파나 영어권 말과는 그 구조가 전혀 달라서
배우는데 어려운 점이 많다. 히브리어도 구미 각국의 언어와는 구조가 전혀
다르므로 중학교 때부터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유태인들 역시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나의 체험으로 미루어볼 때, 어려서 외국어에 접한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장 후 어학 습득 능력에도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외국어의
조기교육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언어를 습득하는 데는 말하는 것보다는 듣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접하도록 하라.

  15.이야기나 우화의 교훈은 어린이 자신이 생각토록 한다
  우화는 지혜의 보고
  내가 알기로는 유태인만큼 이야기를 즐기는 만족도 드물 것이다. 구약성서가
장대한 이야기의 보물창고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탈무드> 역시 기원전 5백 년 전부터 기원후 5백 년에 이르기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들을 10년 동안 약 2천명의 학자들이 모여서 엮은, 1만2천
페이지에 달하는 거대한 분량의 책이다.
  이것은 평생동안 읽어도 모두 읽을 수 없는 대단한 분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해내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
  이처럼 이야기를 좋아하는 유태인 부모가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교훈적인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는 이야기 속의 교훈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만 된다.
  우리 집에서도 남편이 아이들에게 우화를 들려주면서, 그 우화의 교훈을
아이들 스스로 이해하고 터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대부분이 <탈무드>인데, <탈무드>에는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내용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다.
  유태민족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두 머리의 어린이'이야기가 있다.
  "만약에 머리가 둘인 아기가 태어난다면, 이 아기는 두 사람인가 한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 대답을 상상하면서 사고능력을
기르게 된다. 그런데 <탈무드>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만약 뜨거운 물을 한 쪽 머리에 부었을 때 양쪽이 다 비명을 지르면 한
사람이고, 한 쪽만 비명을 지른다면 두 사람이다.

  이 이야기를 그저 하나의 우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유태인에게는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랍비가 말한 것처럼, 유태민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유태인이 박해를 받거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태인이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을 느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유태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유태인이 아니다."
  이처럼 유태의 어린이들은 우화를 통해서 스스로 교훈을 터득하는 훈련을
하고, 또 그 교훈을 통해 민족애를 습득하는 효과도 얻는 것이다.

  이야기의 해석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성서 중에 흔히 인용되는 부분은 '창세기'의 첫 부분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6일 동안 하루가 끝날 때마다 '좋았더라'라고
말했는데, 둘째 날만은 그 말이 빠져 있다. 바다와 육지를 나누는 작업을 셋째
날로 넘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둘째 날에 하나님은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을 나누었는데, 랍비들은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하게 되었다.
  '나눈다'는 것은 천지창조에는 필요했지만, 그것은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좋았더라'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랍비는, 그렇다면 빛과 어둠을 나눈 첫째 날에
'좋았더라'라고 한 것은 어찌 된 것이냐는 반론을 내세웠다. 그러자 '빛과
어둠은 이질이므로 동질인 물을 나눈 둘째 날과는 다르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대하여 '태양은 밤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달은 낮에도
보이는가'라고 반박한 랍비도 있었다.
  논쟁은 계속된다.
  "하나님은 태양과 달을 만드셨다. 달은 하나님에게 하나의 세계에 두 개의
위대한 빛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한 달은 그 벌로 빛이
약해지고 작아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그 대가로 태양은 절대로 밤에는 나오지 못하게 하는 대신에, 달은 낮에도
모습을 나타나게 했다."
  이렇듯 유태인 자녀들은 서로의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그 이치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유태의 이야기나 우화들은 오직 한 가지 해답, 즉 정답에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그것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물론, 동양에도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는 성서나 <탈무드>와 마찬가지로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손치더라도, 어른들이 그것을 오직 한 가지 해석으로 국한시켜 자녀들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녀들의 머리 쓸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의 이야기나 우화들은 오직 한 가지 해답, 즉 정답에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그것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16.어떤 장난감이라도 교육용 완구가 될 수 있다
  유태인 엄마들은 '교육환경 엄마'
  유태인 엄마들은 '교육 엄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동양, 특히 일본의 '교육
엄마'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녀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자녀들의 지능지수에 신경을 쓰거나 천재교육 등 남보다 특별나게
가르치려는 일 따위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어린이의 지적 성장을 돕기 위해
교육환경을 정비하고, 그런 적절한 환경 속에서 자녀들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어린이들의 교육환경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장난감이다.
유태인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장난감 하나를 주더라도 언제나 교육적인 면을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완구',즉 학교 공부와 직결되는 장난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찮은 장난감이나 도구일지라도 선택
방법에 따라서는 기발한 지적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장난감은 한 살에서 세 살까지의 어린이들에게 갖가지 감각적인 자극을
주며, 운동 신경을 발달시키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장난감을 선택할 때 어린이의 마음과 두뇌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측면을
중시한다.
  그렇다면 유태인들은 조상 대대로 어떤 장난감을 선택해 왔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확대경.
  집짓기 나무: 모서리가 정확하게 갈라진 반들반들한 것이 좋다. 정삼각형이나 
정방형 등 기본적인 형태를 두루 갖춘 것이면 더욱 좋다.
  록박스: 뚜껑을 잠갔다 열 수 있는 장난감 통.
  플래시 라이트: 회전전등 같은 것.
  단순한 리듬의 악기: 벨, 트라이 앵글, 탬버린, 드럼, 심벌즈, 실로폰 등.
  분해할 수 있는 것.
  소꿉놀이용 모자: 어린이가 각종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러 모양의 세트로
되어 있는 것.
  큰 자석.
  숫자 맞추기 퍼즐판.
  완성품이 아닌 장난감 집.
  농장놀이 장난감:동물 등.

  세 살이 지나면 흉내낼 수 있는 장난감을 준다.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의 어린이에게는 감각이나 운동신경에 자극을 주는
장난감보다는 지적 자극을 주는 장난감을 선택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장난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집짓기 나무: 공간이 허락하는 한 큰 것을 사주는 것이 좋다.
  어른 흉내를 내는 장난감: 유태인들은 어른을 흉내내는 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이런 종류의 장난감을중요시한다.
병원놀이, 은행놀이, 살림살이, 목수도구, 원예놀이 등이 있는데 위험하지만
않다면 가게에서 파는 것보다는 실제로 어른들이 사용하거나 사용하다 버린
것들이 좋다.
  그림과 조각도구: 크레용, 핑거 페인트, 색연필, 분필, 칠판, 찰흙, 색종이
등.
  악기: 플레이어, 드럼 등 세 살 이하 때에 가지고 놀던 것도 좋다.
  연극용 소도구: 마스크, 의상, 가발, 화장품 등.
  손가락으로 하는 놀이: 주사위, 퍼즐, 도미노 게임, 간단한 보드 게임등.
  사람을 가르치는 장난감: 아기인형, 동물인형 등.

  그러나 이상 열거한 것들을 무두 다 사준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래서 유태인
엄마들은 어린이에게 장난감을 구해 줄 때, 어느 한 편에 기울지 않고 전체적인
자극을 줄 수 있도록 필요할 때마다 장난감의 종류를 바꾸는 배려를 하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찮은 장난감이나 도구일지라도 선택 방법에
따라서는 기발한 지적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17.잠들기 전에 책을 읽어주거나 얘기를 들려준다
  얘기를 들려주면 편안하게 잠든다
  유태인 엄마들의 하루 생활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자녀들을 침대에 눕히고
그 곁에서 잠들 때까지 함께 있는 시간이다. 이는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시간이다.
  어린이들이 낮에 잘못을 저질러서 꾸중을 했더라도, 또 저녁 식사 시간 때
버릇이 나쁘다고 엄한 주의를 주었더라도 일단 침대에 들게 되면 가능한 한
다정하게 토닥거려 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덮고 있는 이불 위에 손을 얹고, '내일은 좋은 날이 될 거야,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이고 ...'라는 식으로 아이들의 마음에 안도감을 심어준다.
이것은 어린이가 잠들 때까지 낮에 있었던 일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근심할까
봐서이다.
  이처럼 자녀들이 하루 이로가 중 그 마무리를 같이하고, 내일도 평온할 것을
빌어주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습관이다.
  보통 어린이가 깊이 잠들 때까지의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엄마들은 짧고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거나 한다. 이는 유태인 엄마들이
자녀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지적 교육방법의 한 가사라고 할 수 있다.
  유태민족의 전통에 따라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는 대개의 경우 구약성서
중에서 골라낸다. 그러나 성서에는 어린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아이가 쉽도록 풀이를 해서 얘기해 주어야 한다.
  이때, 어린이들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것은 주로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탈출한 얘기나 다윗 왕과 거인 골리앗의 이야기 등, 아이들은
수천 년의 역사를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서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마음껏 상상력을 펼친다.
  한편 가정에서뿐 아니라 유치원에서도 성서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는데,
이것은 엄마가 침대 곁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함께, 어린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지혜를 심어주고 길러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러시아 혁명가로 유명한 유태인계 아이자크 도이치는 유치원에
다닐 때, 붉은 수염의 선생님으로부터 '출애굽기'를 여러 번 들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 선생님은 자기 나름의 수식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홍해의
대가와 바다의 향기가 산들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구름기둥을 움직이게
하는 산들바람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라고 말하면, 교실 안에 있는
학생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숨을 죽이며 앉아 있었다고 한다.

  엄마들이 들려주는 성서 이야기는 작가를 낳는 계기가 된다
  엄마들이 들려주는 성서 이야기 중 영웅담에 대한 흥분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과 작가를 낳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태인 중 영웅 나폴레옹을 찬미한 것이 동기가 되어 걸작을 쓰게 된 시인
하이네를 비롯하여 프란츠 카프카, 토커스 만 등 상상력을 구사하는 타입의
인물이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토머스 만은 성서의 단 몇
구절에서 테마를 얻어 장편소설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엄마들이 잠들기 전에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게 하는 습관을
기르는 데도 좋은 효과가 있다. 특히 텔레비전에 매혹되어 잠을 자려 하지 않는
어린이의 나쁜 버릇을 고치는 데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그뿐 아니라 책을 통하여 엄마와 어린이가 대화를 나누는 습관을 붙여주면,
성장한 후에 모자나 모녀가 시간이 적더라고 긴밀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부모와 자식간의 신뢰관계의 기반이 침대 곁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싹트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엄마가 잠들기 전에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보모와 자식간의 신뢰관계를 쌓는 기반이 된다.

  제 2장 정을 기른다
  18.오른손으로는 벌을 주고 왼손으로는 껴안아준다
  껴안아주는 것은 최고의 사랑 표현
  자녀를 기르면서 이따금 벌을 주는 엄마의 행위는 어린이가 잘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구약성서의 잠언 22장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러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 하리라'는 구절이
있는데, 유태인들은 자녀들을 '그들이 가야 할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서만
벌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벌을 줄 때에도 반드시 애정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벌을
주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 벌은 어버이의 권위에 의존해서 어린 자식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결과적으로 자녀들은 개성을 자유롭게
살려나가지 못하고 위축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벌은 어린이의 성장을
돕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오른손으로 벌을 주고 왼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라'는 유태인의 옛 격언은
'벌은 반드시 애정을 수반한 것이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사실 유태인은 도구 같은 것을 써서 어린 자녀를 때리는 따위의 끔찍한 짓은
하지 않으며, 오직 손으로만, 그것도 머리는 피해서 때린다. 한편 유태인에게
있어 껴안는 행위는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다.
  이스라엘에는 농업 생산을 축으로 삼고 있는 '키부츠'라는 공동 생활체가
있다. 이 키부츠는 이스라엘 국가 탄생에 크게 기여했으며, 동양의 젊은이들
중에는 '키부츠'를 견학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다녀간 사람들이 많다.
  '키부츠'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육아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부모가 어린이를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주로 '메타페레트'라고 불리는 잘
훈련된 육아전문 여성이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들은 부모가
있는 자기 집이 아닌 '어린이 집'에 있는 것은 아니고, 오후 4시부터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는 각기 자기 집에서 보낸다. 너무 어려서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는 부모들이 와서 데려가는데, 이때 볼 수 있는 광경은 제일 먼저 어머니가
자녀를 포근하게 껴안는 모습이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는 자녀를 껴안은 채 그
아이가 기거하는 방으로 가서 다른 한 손으로 서랍을 열고는 옷가지와 기저귀
등을 챙긴다.
  이런 광경은 키부츠뿐 아니라 유치원 등으로 아이를 마중 나가는 유태인
어머니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프로이트의 전기를 보면, 그의 엄마는 항상 그를 껴안고 '꼬마 무안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꼬마 무안인'은 그의 별명이다.
  이처럼 오른손으로는 때리고 왼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는 것은, 유태의
어머니가 자녀들을 길들이는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가정에서도 스파르타식으로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데,
이러한 경우에도 때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한 쪽 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이 포인트!
  벌을 줄 때에도 반드시 애정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벌을 주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결과적으로 자녀들은 개성을 자유롭게 살려나가지 못하고 위축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오른손으로는 때리고 왼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19.심한 꾸지람을 했더라도 재울 때는 다정하게 대한다
  나쁜 감정을 꿈속으로까지 가져가지 않게 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첫머리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첫째날 낮과 밤을
구분해서 나누었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 인간들은 하루를 주기로 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낮이 지나 밤에 이르러 잠들 때까지 그날
하룻동안 있었던 모든 일은 그날이 지나기 전에 마무리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민족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루의 일과 중 두려웠던 일이나 슬펐던
경험을 그날로써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리 자녀들을 심하게
꾸짖었더라도 잠자리에 들 때만은 정답게 다독거려 주어 좋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어린 가슴속에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마치 스폰지와 같아서, 혼을 낸 담음 다독거려 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나쁜 감정을 그대로 흡수해 버린다. 그러나 한 번쯤
정답게 쓰다듬어 두면 스폰지에서 물이 빠져나온 듯이 나쁜 감정도 쉽게
흘러나오고 마는 법이다.
  공포감이나 혐오감, 증오심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이의 꿈속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나쁜 감정이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되면, 그 다음날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다정스러운 태도만큼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것은 없다.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산 속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던 어느 날의 일이다.
프로이트는 딸 안나가 잠꼬대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안나 프로이트, 딸기 많이, 딸기 많이"
  안나는 그날 아침 배가 아팠기 때문에 좋아하는 딸기를 먹지 못했었는데,
그것이 '딸기 많이'라고 잠꼬대를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갖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꿈속에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1처 가지나 되는 꿈의 실례를 수집함으로써 '꿈은 무의식에서
생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어린 시절의 원시적 감정을 반영한 것이
꿈이라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실제로 누구든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불쾌했던
체험이 어른이 된 다음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단언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그날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그런 것들이
무의식중에 축적되어 꿈을 꾸게 되는 셈인데, 유태 어머니들은 여러 감정
가운데에서 적어도 부정적인 감정만을 어린이들로부터 말끔히 제거시켜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침대에 누운 자녀 곁에 앉아 정답게 껴안아주는 다정스런 어머니 ...
이것만큼 아이들에게 평온한 마음을 주는 것은 없다. 어머니의 이 다정한
배려가 아이들에게는 안정감을 주고, 하루 일과의 긴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날이 밝으면 다시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다 보며 자녀들은 지난 일을 되씹으며 과거에 얽매이는
인간이 되지 않고, 항상 산뜻한 기분으로 앞을 내다보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아무리 자녀들을 심하게 꾸짖었더라도 잠자리에 들 때만은 정답게 다독거려
주어 좋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어린 가슴속에 남아 있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20.어른들이 쓰는 물건과 장소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미용실에는 어른이 된 후에 보내라
  내게는 열세 살과 여덟 살된 딸이 있다. 그런데 둘째 딸아이는 여자답게 제법
멋을 내는 데 민감했다. 그 애는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헤어스타일을
눈여겨보아서 그런지, 이따금 '엄마, 나도 미장원에 데리고 가줘요 깨끗하게
머리 손질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라고 조르곤 한다.
  그러나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네가 큰 다음에 네 힘으로 돈 벌어서 미용실이고 어디고 마음대로 가.
지금은 안 돼."
  그러고는 딸애의 머리 손질을 직접 해준다. 큰 딸애와는 가끔 미용실에 함께
간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커트만 하게 하고 그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유는 작은 딸애에게 한 말과 같다.
  유태인들은 다른 나라 어른들과는 달리, 어른과 아이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언제나 어린이들에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구약성서에, '부모는 자녀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과 장남의 특권을 빼앗는 것
이외에는 자녀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다'고 되어 있다.
  어린 자녀들을 어른의 세계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모의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해놓기 위해서이다. 딸들이 내 화장품에 관심을 보이며 루주를
발라보고 싶다면서 이따금 떼를 쓰는 일이 있지만, 나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정장을 할 수 있는 축제 때만은 딸들에게도
화장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만, 그날 이외에는 화장품에 절대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부모 자식간의 경계선이 없으면 그 관계는 허물어진다
  요즈음은 어디서나 어린이용 화장품을 팔고 있는데, 과연 그런 상품을 만들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또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어른들의 패션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어린이옷이 아주 많다. 게다가 어린이가 마치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어머니들도 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이래도 되는 것인가'하고 의문을 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은 부모와 자식간의 경계선을 허물어버리는 것이 새로운
부모 자식 관계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
유태인들은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어는 시대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녀가 어린이답게 행동하지 않고 어른들을 흉내낼 때 부모들이 그런 행동을
좋게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자녀들에게 어른을 존경하도록 가르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즉, 어린이들은 '작은 어른'이 아니라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평소 가르치지 않는다면,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포인트!
  가정의 참다운 질서가 유지되려면, 어린이들은 '작은 어른'이 아니라
어른들과는 구분되는 별개의 인간임을 인식시켜야 한다.

  21.평생을 가르치려면 어릴 때 마음껏 놀게 하라
  죽어도 자식신세 질 생각은 하지 말라
  한국과 일본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어릴 적부터 '공부하라,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자녀들이 자유롭게 놀 시간마저 빼앗아버린다.
  나에게는 부모들의 그런 행동이 마치 자녀들이 일류 대학, 일류 회사에
들어가 빨리 돈을 벌어 자신들의 노후를 보살펴주기를 바라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양인과 유태인의 자녀 교육법의 차이는 보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언제까지 지속시키느냐 하는 시간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기로 하자.
  우리 유태인의 경우 자녀는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자녀일 뿐이다. 부모는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부모로서의 역할을 해야한다. 또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늙어서 자식들의 도움을 받겠다는 부모는 한 사람도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긴 안목에서 생각한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부모이고, 자식 역시 평생 자식이므로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 집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나의 할아버지는 큰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전에 이 과수원을 아들에게
분할하여 형식적으로는 상속을 해주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할아버지 자신의
손으로 과수원을 운영했으며, 거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해 내갔다.
그러므로 과수원의 아들, 즉 나의 아버지에게 넘겨진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다.
  이렇듯 유태민족은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관습이다.
  그러나 동양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업을 마칠 때까지만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면 된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부모와 자식간의 역할을 짧은 시간 내에 끝맺고자 하는 것이다.
  동양인과 유태인의 교육 방법 중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놀 때는 마음껏 놀게 하라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유태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놀 수 있는 시기에는 마음껏 놀게 한다. 다시 말해서
어린 시절에 놀 기회를 빼앗아버리면 배움의 길에 들어섰을 때 놀 수 있는
시간을 얻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서의 놀이는 정신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을 빼앗으면서까지 공부만을 강요한다는
것은 긴 안목으로 볼 때 절대 현명한 방법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학문은 어른이 된 다음부터 이루어진다고 유태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동양의 어머니들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가
중요하므로 그때까지만 가르치면 된다. 그 후는 그다지 학문의 필요성이
없으므로 될 수 있으면 어렸을 때 공부에 열중하도록 해서 유명한 대학에
들여보내면 그만이다. 생각으로 부모로서의 책임감에서 일찍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녀들의 미래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놀고 싶을 때
마음대로 놀게 하라.

  이것이 포인트!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유태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놀 수 있는 시기에는 마음껏 놀게 하라.

  22.가정교육에 좋지 못한 것은 서슴없이 거절한다
  초콜릿은 주지 마세요
  자녀들에 대한 모든 책임은 부모가 진다. 나 또한 우리 아이들의 가정교육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가정교육에 대해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의
성장 과정의 지침은, 부모이지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딸아이가 어렸을 때, 나는 초콜릿 같은 단 것을 절대 주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 아주머니 한 분이 초콜릿을 가지고 와서는 딸애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아주머니는 선의의 인사 표시를 한 것이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애입니다. 아이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는 내가 선택합니다.
더구나 단 것이나 자극성 있는 음식은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것쯤은 자녀를
키우는 아주머니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초콜릿은 주지
말았으면 합니다."
  동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이런 태도는 대단한 실례일 뿐만 아니라 냉정한
인상을 주는 말이 되겠지만, 유태인들에겐 당연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위와 같은 경우는 어느 때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있는 일인만큼, 그때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가정교육'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분명하게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도 나를 그렇게 키우셨고, 내 딸아이도 어머니가
된다면 틀림없이 내가 한 대로 따를 것이다.
  이런 행동은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절대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대개
자기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무엇을 하면 되고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준을 어른인 부모가 확실하게
제시해 주고, 거기에 대한 책임 또한 부모가 진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녀들은 부모가 세워놓은 기준에 의하여 심신이 고르게 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남의 간섭을 받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쪽을 택하게 마련이다. 어린이들은 더
더욱 그렇다.
  만약 부모가 '가정교육'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면 자녀들은 가정교육보다
엄격하지 않은 방법을 찾아 그쪽으로 따라가게 될 것이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하는 것은 자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기도 쉽고, 즐거운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정교육을 시키는 데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남의
간섭이다. 그렇게 된다면 하루하루 들인 정성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빗나간 자녀들을 다시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으려면 여태까지 투자한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더구나 자녀의 정신적인 성장은 정지되고 말
것이며, 그것은 자녀들의 앞날에도 큰 손해를 끼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녀들을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남의 간섭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자녀들은 의지가 약한
어린이로 성장할 위험성이 많아진다.
  유태인은 남들이 완고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처럼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심리적인 거점이 되는
동시에 신념의 중요성을 심어주는 대단히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들을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남의 간섭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의 성장과정의 지침은 부모이지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23.조상의 이름을 통해 '가족의 맥'을 일깨워준다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유태인 이름
  유태인을 만나거나 유태인과 관계된 책들을 읽다보면, 사람들 이름 중
첫머리에 야곱, 아브라함, 사무엘, 다윗, 이삭 등 유태인 조상들의 이름을 붙인
독특한 이름이 많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성경이나 유태인의 전통에서 따온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우리 집 큰딸아이의 이름 '아비가일'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다윗왕의
첫째 부인의 이름을 딴 것이며, 또 둘째 딸아이 '타마르'와 장남 '오난'도 모두
성서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더욱이 유태인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 등 친족의 이름을
자녀들 이름에 붙여주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이는 가족의 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자녀들에게 자가시키기 위함이고, 또한 유태인이 가족의 전통에
충실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과거 수천 년에 걸쳐 몇 만 명, 몇 천 명의
타마르나 이삭, 다윗 등의 동명이인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의 친구 마잘 토케이어의 남편, 즉 앞에서 잠깐 소개한 적이 있는 마빈
역시 그의 외삼촌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외삼촌은 헝가리의 육군병사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전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태인들은 죽은 조상을 기억하기 위한 이름을 짓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죽은 조상의 이름만을 따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토케이어 부부의 장남 아미엘은 마잘의 부친, 즉 아미엘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이다. 그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데, 마잘에 따르면, 장녀인
사라가 태어난 지 2주일만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이름을 짓게 된
동기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잘의 시아버지와 친아버지의 이름이 우연하게도 동명이었으므로
장남이 태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정을 설명하고는,
아미엘 이란 이름을 짓고 싶다고 했더니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명예로운
일이다'라며 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유태인은 유행에 좌우되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들이 성장하면 그들 이름의 유래를 설명해 주는 등 가족의
일체감을 심어주며, 또 그 이름을 근거로 해서 성경이나 이스라엘의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민족적 자각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한다.
  얼핏 생각해도 자기와 똑같은 이름을 가졌던 조상이나 위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린이들은 그만큼 자기 조상에 대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러시아 혁명사>의 저자인 아이자크 도이처는, 탈무드 학자로서 엄격한
유태교도였던 증조부에게서 '아이자크'라는 이름을 이어받았고,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지크문트'는 전설에 나오는 영웅 이름이다.
  한편, 지난날 일본에서는 아버지의 이름 중에서 한 글자만을 자녀 이름에
붙여주었는데, 요즈음에 와서는 그런 전통도 사라졌다고 한다. 반면 그때
그때의 유행에 좌우되어, 황태자가 성혼하던 해에는 황태자비의 이름인
미치코란 이름의 신생아가,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 있을 땐 그 드라마
주인공의 이름을 본뜬 신생아가 급증했다고 하니, 유태인인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자녀들의 이름짓기는 자녀들의 교육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지, 결코 시대의
흐름이나 유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행이란 물같이 흘러가며 변하기도 쉽기 때문에, 어린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될 무렵이면 유행하던 시절에 빛을 보던 이름도 그 빛을 잃고 말아, 자녀들이
'내 이름은 왜 이렇게 고리타분해요?'라고 따진다면 그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우리 유태인들은 가정의 전통을 떳떳하게 자녀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이름도 언젠가는 손자나 증손자의
이름으로 다시 불려지게 될 것이므로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친족의 이름을 자녀들 이름에 붙여주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는데,
이는 가족의 맥은 물론, 민족적 자각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24.아버지의 휴일은 자녀교육에 꼭 필요하다.
  안식일은 엄격하게 지킨다.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와 자녀간에 대화 단절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비단 일본을 포함한 동양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아버지가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하루 평균 3분이라고 한다.
  '3분간 기다리는 거야'라는 유머러스한 일본의 텔레비전 광고카피가
생각나는데, 아버지와 자녀들은 인스턴트 카레가 익을 때까지의 시간
정도밖에는 대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자녀들이 부모, 특히
아버지로부터 좋은 말을 듣거나 올바른 행동을 배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태인의 가정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없다.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가정의 가장으로서 존경하며, 아버지 역시 한 가정의 중심답게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은 자연히 아버지를 본받으면서 자라난다.
공부하는 것도, 친구를 사귀는 것도 모두 아버지한테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유태인들의 안식일(샵바트) 때문이다. 여기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안식일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모세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 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7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 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오늘날에는 정말 죽이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유태인들은 지금도 금요일 해가
지면서부터 다음날 해가 지기 직전까지는 안식일에는 불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요리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부들은 안식일에는 불을 피울 수
없으므로 미리 모든 것을 장만 해 둔다. 또한 자동차는 물론이고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을 정도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가면, '정통파' 유태교인 수천 명이 검은 수염에
검은 코드 차림으로 안식일 날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이때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걷다가는 돌에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설사 돌에 얻어맞았다 해도
어느 누구 한 사람 보호해 줄 사람도 없다.
  이처럼 유태인들 사이에는 안식일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어, 가장인
아버지는 이날 집 안팎의 모든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평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자녀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는다.

  아버지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안식일이 되면 아버지는 언제나 자녀들을 한 사람씩 방으로 불러서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한 주일 동안 있었던 일, 공부에 관해 들어보고 거기에 대해서
조언을 해준다.
  물론 이런 대화들은 아버지와 자녀간의 관계를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한 가정의 가장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 상의 이미지가
확고하게 확립되는 한편, 그러한 아버지야말로 산 교육을 행하는 '선생님'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이자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만남의 시간은 대개 30분 정도가 보통이지만,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일주일
동안 겪은 일들에 대해 아버지의 의견을 듣고 총정리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또한 유태인 아버지들은 평일에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저녁 식사를 가족과
함께 들 수 있게 일찍 귀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동양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귀가 시간이 일정치 않거나 자녀들이
잠든 후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마치 아버지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일요일이면 골프나 낚시를 하러 나가버리기 때문에 자녀들과의 대화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안식일 같은 관습이나 규칙은 없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일요일만큼은
자녀들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느 나라 아버지들이나 똑같겠지만, 유태인 아버지들은 특히 자녀들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배려한다.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차린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아들의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성격을 크게 걱정하면서, 장성한 아들에게 '흥분하지 말라.
신중하게 행동하고 교양을 몸에 익혀라. 은인에게는 경의를 표할 줄 알아야
하며 반항적이고 비사회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유태인의 아버지 상이다.
  아버지가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부모의 자식간의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포인트!
  엄격하게 지켜지는 안식일의 전통은 평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아버지와 자녀들이 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휴일마다 아버지가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부모와 자식간의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25.세대가 다른 여러 사람과 친밀하게 접촉하라
  '폐쇄공간'이 되기 쉬운 핵가족
  구미 각국에서는 오래 전부터의 일이지만, 동양에서도 핵가족이 점차 늘어나
이제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부부와 자녀들로만 구성된
이 핵가족 제도는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는 거의 예외 없이 존재하는 것 같다.
  전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었던 대가족과 비교해 본다면 현재의
핵가족은, 어느 면에서는 확실히 세대간의 불화도 적어지고 집안의 공간도 여유
있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주부에게는 시부모를 비롯한 여러
인간관계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육아나 자녀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이상적인 가족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녀들이 웃어른인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삼촌,
숙모 등 세대가 다른 어른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을 기회가 없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지적인 자극이 적은, 이를테면 폐쇄공간에서 살게 될 위험성이
많다.
  나는 자녀들을 올바르게 기르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세대가 다른 여러 사람과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태인들이 말하는 '가족'이란 자녀들과 부모뿐 아니라 조부모, 그 밖에
삼촌이나 숙모, 그리고 사촌형제까지를 일컫는다. 그러나 유태인들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삼촌과 숙모, 사촌들은 가족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우리 가정의 예를 들면, 축제일이나 주말에는 서로 친척들을 방문해 즐거운
시간을 하께 보낸다. 말하자면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일체감을 다짐하는 날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먼 곳에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딸들이 모처럼의 휴일을
이용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느낌과 흡사하다.
  물론 가족의 의미를 중요시하는 유태인이라 할지라도 가깝게 모여 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은 자기 부모와 다른 생활, 다른
사고방식,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친척 어른들과 접촉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다른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유태인들의 지혜는
단지 한 사람에게서 다른 한 사람에게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와의
단절 없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대가족 속에서 자라난 시인 하이네
  독일의 유태계 시인 하이네는 대가족들 사이에서 성장함으로써 재능을 꽃피운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증조부와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시인으로서의 소질을 길렀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거의 배울 것이 없었던 하이네에게는 외삼촌인 시몬 반 괴르테론의
서고가 그의 교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서고에서 데카르트, 네테스하임,
헤르몬트 등의 철학서적을 탐독했으며, 그 결과 '나의 가슴속에 문필적 시도를
할 용기와 욕망이 불타오르게 되었다'고 회상할 만큼 지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서고에서 하이네는 조부의 형제인 종조부 시몬의 방랑생활을 통해
모험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정열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하이네는 이와 같은 가족적인 배경에서 태어난
것이다. 만약 그가 핵가족 속에서 성장했더라면, 어쩌면 그의 재능은
발견되지도, 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유태인의 대가족 제도는 이처럼 자녀들의 정신적인 성장을 돕는 데 더 없이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들을 올바르게 기르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정신적 성장을 돕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세대가 다른 여러 사람과 친밀하게 접촉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6.친구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 올라서라
  공부를 잘한다고 좋은 친구는 아니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특히 유태인은 친구와의 교제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러나 아무나 하고 교제를 하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우리 유태인은 친구 한 명을 사귀어도 참된 친구를
선택하도록 언제나 신중을 기한다.
  친구란 무엇보다 우선 자기를 이끌어줄 사람이어야 한다. <탈무드>에 '친구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 올라서라'고 씌어 있는 것처럼, 자기 향상에 도움이 되는
친구라면 더욱 바람직스러울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바람직스럽지 못한 친구일
경우에는 '엄마는 그 친구와 교제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분명히 의사표시를
한다. 그것은 곧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내려가는'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단계 올라서서 친구를 선택하라'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을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유태인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다. 무어보다도 자기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중요시한다.
  예를 들어, 비록 식사 때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솜씨가 서툴다 하더라도
남보다 여러 나라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더 높게 평가받는다. 즉,
포크를 맵시 있게 사용하는 것보다는 한 나라 말이라도 외국어를 마스터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극히 단면적인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공부는 잘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개성이나 가능성을 이끌어줄 상대라면 역시
'한 계단 올라선' 친구를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부모의 시각으로 자녀의
친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태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친구에게서 자극을 받아 개성이 연마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아무리 싫어하는
타입이라도 반대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녀 중심으로 판단을 내린다.

  좋은 친구가 위인을 만든다
  유태인이 성장한 다음에도 친구를 잘 선택하고 무엇보다 친구를 중요시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 향상'을 위해 친구를 선택했던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예로, 유태계 음악가인 다리우스 미요가 청년 시절에 만난 두 친구의
우정에 자극을 받아 수많은 명곡을 작곡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시인
하이네 역시 유태계 철학자 칼 마르크스와 교제할 때, 그 우정에 영향을 받아
산문시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독일의 겨울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특히 하이네는 마르크스보다 스물 한 살이나 위로, 나이로 따진다면 하이네가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어야 하겠지만, 오히려 하이네가 마르크스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나이 차이는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또한 천재적인 음악가 구스타프 마라도는 36년 연상의 작곡가 브루크너와
사제지간이었으면서도 마치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탈무드>에 '애매한 친구보다는 분명한 적이 되라'말이 있다. 이 말은 친구를
사귀려면 '분명한 친구'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비록 공부는 잘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개성이나 가능성을 이끌어줄 친구라면
얼마든지 사귀도록 하라. 자녀의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부모의 시각으로 자녀의 친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7.아이들끼리 친구라고 해서 그 부모들까지 친구일 수는 없다
  아이들끼리의 우정은 부모와는 무관하다
  동양,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에서는 아이가 없을 때는 이웃과 서로 내왕이
없다가도 아이가 태어나면 차츰 그 아이들로 인해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부부가
많다고 한다.
  일본에 사는 내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녀의 딸이 두어 살 정도가 되어 집밖에서 놀면서부터 이웃집 아이들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딸아이의 가장 친한 여자 친구가 매일 아침
현관으로 딸아이를 데리러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까지는 괜찮았으나, 어느
날인가부터는 아이를 따랄 그 아이의 어머니가 함께 놀러오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직 인사를 나눈 적이 없는데도 마치 친한 사이처럼 말을
걸어오더니, 마침내는 집안에까지 들어와서는 한 시간 이상이나 수다를 떨다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자 그 친구는, '정말 곤란해. 나는 친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데, 그녀는 마치 나와 오랜 친구나 되는 것처럼 시장이나
하이킹을 가자는 것 아니겠어'라면 내게 하소연을 했다.
  우리 유태인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교제란 절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자녀들을 통해 부모들이 가까워지는 일은 없다. 부모들은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낼 뿐, 그 한계를 넘어선 '친구'관계로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친구가 채소를 가지고 있으면 고기를 주어라
  유태인의 격언 중에 '남의 백 마디 중상보다 친구의 무분별한 한마디의 말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친구는 중요한 존재이며, 또한 마치
자기 자신의 일부분과도 같다는 뜻이다. 자녀들끼리 친하다고 해서 부모들까지
쉽사리 친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단 친구로
생각하면 '친구가 채소를 가지고 있으면 고기를 줄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
  한편, 부모들끼리 친구 사이라고 해서 자녀들끼리 친구가 되라는 법 또한
없다.
  나의 경우, 친한 친구를 집으로 초대한다고 해도 대개 저녁식사 후에 하므로
아이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간 다음이다. 혹시 아이들이 나와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방에 들어오는 일이 있어도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만 할 뿐,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거나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이들 친구의 부모에게 대하듯이, 우리 아이들도 나의 친구를 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녀들은 자녀끼리, 부모는 부모끼리 각각 우정을 나누는 것이 우리
유태인들의 '교제방법'의 기본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내 친구와 친해진다고 해서 무슨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요는 서로가 인격적으로 신뢰하며 교제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자녀들이 친구라서' 또는 '부모들이 친구라서'라는 조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포인트!
  아이들끼리의 우정 때문에 그 부모가 서로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
부모들끼리 친구 사이라고 해서 자녀들끼리 친구가 되라는 법 또한 없다.

  28.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젖먹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
  젖먹이를 바깥세상과 접촉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 유태인들은 생후 1년 전후의 젖먹이는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젖먹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더구나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더 더욱 그렇다. 그것은 아기에게도
어른에게도 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친구로부터 '오늘 놀러오지 않으래?'라는 청을 받는 경우가 있지만,
돌이 안 된 아기가 딸려 있는 동안에는 '아기와 함께 있어만 돼'라고 정중하게
거절한다.
  때로는 아기와 함께 와도 좋다는 조건으로 초대를 받더라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데리고 가는 일이 거의 없다. 설사 데리고 가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수다를 떨며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야말로 간단히 커피 한 잔 정도 들고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철없는 아기들은 대개 의자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귀중품이나 깨질 염려가
있는 물건에도 손을 대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초대를 한 쪽은 물론 아기의
부모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기 쪽에서 보더라도 자신이 취하는 행동 모두를 엄마로부터 제지당하는
꼴이 되니, 이것은 엄마나 아기, 또 초대한 주인에게 신경만 쓰일 뿐 아무런
이득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낮에는 간혹 데리고 가는 수가 있지만, 밤에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은 결코 없다. 어릴 때부터 일정한 시간에 잠자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만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해야 한다.

  어중간한 교제는 아기나 부모 모두에게 이롭지 못하다
  나는 동양의 어머니들이 흔히 젖먹이를 등에 업고, 혹은 안고서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내 친구 집에서 그런 어머니를 본 적이 있는데, 그녀는 아기 시중을 드는
것이 목적인지 친구와 환담을 하는 것이 목적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아기에게만 신경 쓰다가, 친구와는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방문은 아기 엄마에게 있어서 불유쾌한 일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모처럼 즐거워야 할 만남인데 아기 시중드는 데 정신이 팔리다 보면, 초대한
쪽이나 방문한 쪽이나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즐길 때는 마음껏 즐겨야 한다. 어중간한 즐거움은 차라리 즐기지 않느니만
도 못하다는 것이 유태인의 사고방식이다.
  젖먹이를 양육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아기만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아기에게도 엄마에게도 행복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엄마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그대로
놔두지 않는 것 같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은 아기들을 몹시 보고 싶어하며
오히려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고 오는 것을 환영한다.
  커가는 아기의 재롱을 보고 어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움이 될지 모르지만,
아기나 엄마에게는 즐거움은커녕 괴로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는
아기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쓸데없는 신경을 써서 피로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아기에게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줄 염려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한 살 전후의 아기와 그 엄마는 편하게 지내도록 신경을
써주며, 되도록 외출은 삼가도록 한다.

  이것이 포인트!
  젖먹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은 자칫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줄 염려가 있다.
왜냐하면 아기는 아기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쓸데없는 신경을 써서 피로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29.친절을 통해 아이를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운다
  친절을 부정하다 불타 죽은 소돔 사람들
  친절은 유태인에게 있어, 단지 도덕이나 공공심이라는 교훈적인 행위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란 나름대로 지혜 있는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자녀들이 무엇인가 남을 위해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서
부모가 칭찬을 한다거나, 자녀들 자신이 칭찬 받을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남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권장할 일이 못 된다.
  친절이란 자녀들 개개인의, 특히 마음의 성장을 나타내는 행위이므로 부모나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분별없이 강요하거나 칭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유태인들이 소중히 여기고 있는 구약성서에는 친절에 관한 이야기가 몇 군데
나온다. 이중 '소돔과 고모라'는 친절이라는 지혜를 망각한 인간들의 죄를 잘
표현한 얘기인데, 여기서 잠시 소개할까 한다.

  소돔은 인근에 있는 도시인 고모라와 함께 사해의 남쪽 해안에 접해 있는
곳이었다. 어느 날 소돔으로 한 나그네가 찾아와서는 이 도시의 금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그가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그가 지키고 있는 금화 50닢을 훔쳐가 버렸다.
이 나그네는 도둑맞은 금화를 변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딸과 함께 노예로
팔려갔다.
  그런데 이 소돔의 백성들은 사실 죄 많은 인간들로, 오랫동안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잔악한 일들을 저질러 왔다. 이 나그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소돔의 시민 중 한 사람이 그 금화를
훔쳤던 것이다.
  그런데 노예로 팔려간 딸 중 하나가 옛 친구를 만나 먹을 것이 없다고
애걸하자 친절한 친구는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돔 시민들은 친구에게 먹을 것을 준 친절한 친구를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
처형 방법도 잔인해서, 발가벗긴 온 몸에다 꿀을 바른 다음 벌집 아래 매달아
수많은 벌들이 쏘아 죽이게 하는 잔인한 방법을 썼던 것이다.
  그 결과 친절한 인간을 죽인 도시는 다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세기 제19장)

  이와 같이 친절은 최고의 지혜인 한편, 친절을 부정하는 행위는 마땅히
최고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손님이 헛기침을 하면 스푼을 주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친절에 보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다. 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유태의 격언에 '손님이 헛기침을 하면 스푼을 주라'는 말이 있다. '스푼을
주십시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는 손님의 마음을 재빨리 눈치채고
스푼을 챙겨주는 친절을 베풀라는 뜻이다. 그만큼 남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심한 배려를 잊지 말라는, 지극히 유태인다운 격언이다.
  친절이란 꼭 남의 칭찬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행위만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생활의 사소한 배려에서 나오는 행위를 뜻한다. 말을 바꾸면, 친절이란 그것이
도덕이니 공공심에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 상대방에 대한 마음씀씀이를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포인트!
  친절이란 자녀들 개개인의, 특히 마음의 성장을 나타내는 행위이므로 부모나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분별없이 강요하거나 칭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30.자선행위를 통해 사회를 배운다
  '선행'은 사후에까지 남는다
  언젠가 일본의 한 거리에서 '사랑의 열매'라든가, 신체장애자를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동양인들이 이런 '자선활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으나 유태인들은
자선행위 등 남을 위한, 특히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나 신체장애자에
대한 선행에 대해서는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예로부터 유태인들 사이에는 그런 행위에 대한 확실한 가치 기준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예를 한 번 들어보자. <탈무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우화가 나온다.
  옛날 어느 왕이 한 남자에게 사신을 보내어 곧 입궁하라고 명령했다. 그
남자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중 한 친구와는 매우 적절한 사이였다.
두 번째 친구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친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는 친구이기는 했으나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겁에 질린 그는 무엇인가 문책을 당할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왕의 명령인지라 아니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
친구를 불러 동행해 주기를 간청했다.
  먼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냉정하게 한마다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왕궁의 대문 앞까지만 동행하겠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자네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함께
임금님을 만나도록 하세."
  이렇게 쾌히 승낙한 친구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닌 세 번째 친구였다.

  <탈무드>에 의하면, 첫 번째 친구는 다름 아닌 '재산'을 말하는 것으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죽을 때는 가지고 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을 뜻하는 것으로, 겨우 화장터까지만 동행한다는 의미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가주겠다는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을 뜻하는 것으로,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사후에까지 남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다.
  가난한 사람,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선행'은 <탈무드>가 집대성된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재산이나 친척보다도 훨씬
소중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공공관념이 매우 부족한 것 같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의 지성이라 할 대학생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시비를 걸고 폭행을 가하는 행위에 대해 나 나름대로 냉정히 생각해
보았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전철이나 버스 등에서 젊은이들이 노약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거나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모르는 체하는 광경을 더러 볼 수 있다.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나이가 많은 분들이다.
  공공관념의 결여는 대개 어렸을 때 형성된다. 그런 까닭에 사회 윤리를 바로
보는 눈이 트이지 않는 것이다. 즉,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류 대학에 들어가고
또 일류 회사에 입사하기만을 바라는 부모들이, 어떻게 해야 남과 원만하게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배움과 일과 자선 위에서 성립된다
  유태의 속담에 '세상은 배우는 것과, 일하는 것과, 자선행위 위에서
성립된다'는 말이 있다. 즉 인간이란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제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자선행위'를 할 줄 모른다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선'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체다카'는 정의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영어로
'자선'에 해당하는 '채리타'가 라틴어의 '베풀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유태인에게 있어 '자선행위'는 '정의' 바로 그것으로 통한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조그만 저금통을 사주고 '자선'을
위해 저축하도록 가르치는데, 아이들은 교회당(시나고그)에 갈 때마다 저축했던
돈을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바친다. 그런 행위를 통해 자신과 이 사회가
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노인이나 신체장애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닌 듯 자연스럽게 행하며, 어떤 저항감도 느끼지 않고 사회윤리에
동화되어 가는 것도 바로 이 '자선행위'를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남에게 선물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런 행위 역시 선심을 쓴다는
의식에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려면 당연히 취해야 할 행위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생활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지능개발에 신경을 쓰는 것도 좋겠지만,
일찍부터 사회의 그늘진 곳에 눈을 돌리는 지혜를 가르쳐줌으로써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제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자선행위'를 할 줄
모른다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아이의 지능개발에 신경
쓰는 것도 좋겠지만, 일찍부터 사회의 그늘진 곳에 눈을 돌리는 지혜를
가르쳐줌으로써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31.돈으로 선물을 대신하지 말라
  큰 부자는 자식이 없고 오직 상속자만 있을 뿐이다
  유태의 격언에 '큰 부자에게는 자식이 없다. 오직 상속자가 있을
뿐이다'라는, 매우 냉정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 있다.
  큰 부자는 싸늘하고 차가운 돈을 가득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
차가운 기운이 자신의 가슴에 전해지고 나아가 자식들에게도 전염되어 따스한
마음이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가정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은 다만 부모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싸늘한' 돈의 상속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이 격언은 가르쳐주고 있다. 즉, 부모와 자식 사이에
금전문제가 개입되다 보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유태인들은 자녀나 다른 아이들에게 선물을 할 경우, 선물 대신
돈을 주는 짓 따위는 결코 하지 않는다. 선물 대신 돈을 준다는 것은 결국 '이
돈으로 무엇이든 네 마음대로 사 가져라'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무성의한 태도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로서의 애정이 부족하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가끔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이 돌아가면서, '자녀들에게 전해주세요'라며
돈을 놓고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나는, 아이들에게 '친절하신 분이 돈을 놓고 가셨다. 그분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라'고 말하며 돈을 나누어준다.
  어떤 선물이든지 간에 거기에는 반드시 의미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부모와
자식간에 오가는 선물 역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인간적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돈이란 이런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19세기 중엽까지 유태인 중에는 손꼽히는 갑부였던 로스차일드가의 암셰르는,
반유태계 폭도들이 습격해 오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 많은 유태인에게서 돈을 얻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독일인은 다 합쳐야
4천만 명에 불과해. 그 정도의 금화는 내게도 있어. 우선 한 사람 당 1프로린씩
던져주지."
  그러고는 손을 내미는 폭도들에게 돈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암셰르에게는 끝내 자식이 없었다. 만약 자식이 있었다면 그렇게
'모욕적'인 방법으로 돈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돈은 결코 애정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애정의 표시이어야 할 선물
대신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어린이는 진정한 돈의 가치를 모른다
  유태인은 돈에 인색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질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아닐까.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시대는 이미 유태인이 영국 땅에서 추방되고 난
후였다. 즉, 셰익스피어는 유태인에 대한 편견이 한창일 때 자라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갖고 있었던 유태인에 대한 편견, 다시 말해서
셰익스피어의 마음속에 '내재화'되어 있던 편견이 고리대금업자의 모습으로
유태인을 그리게 된 것이다. 즉 돈을 죄악시하는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두툼한
지갑은 별로 훌륭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빈 지갑은 나쁘다(유태인의 격언)'고
말하는 유태인을 상대적으로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으로 그린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유태의 격언 중에 '돈이란 무자비한 주인에게도 유익한 하인이 된다'는 말도
있다.
  돈 자체는 따지고 보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주인이 되는 것도
하인이 되는 것도 그 돈을 쓰는 사람의 인간성, 즉 됨됨이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이처럼 돈의 미묘한 성격에 대해 가르쳐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얘기로 설명해 주는 경우가 많다.

  18세기까지 유태인에게는 아직 성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가 유태인들에게 성을 팔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은 좋은 성을 사기 위해서
많은 돈을 지불했으며, 나쁜 성은 싼값에 거래되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유신 때까지는 보통사람은 성이 없었다고 하는데, 우리
유태인들도 똑같은 처지였던 셈이다. 유신에 의해서 자유롭게 성을 선택하게 된
일본인들은 그나마 유태인들보다는 나은 편이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좋은
이름을 사기 위해서 많은 돈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보석이나 꽃의 이름은 매우 비쌌다. 로우젠탈(장미)이란 유태
이름은 비싼 돈을 지불하고 얻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개중에는 골드
브룸(황금꽃) 따위의 욕심을 부린 성도 있다.
  한편, 싼 이름으로는 동물을 상징하는 윌프슨(늑대) 등이 있고, 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힌터게슈트(엉덩이) 따위의 별난 성이 주어지기도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자녀들은 '로우젠탈보다는 윌프슨이 훨씬 좋게
들려요'라며 아주 재미있어 한다. 그러나 재미있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이야기의 본질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돈이란 사람에 따라서 여러모로 사용되지만, 로우젠탈 씨가 힌터게슈트
씨보다 인간적인 면에서 훌륭하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처럼 아직 돈의 진짜 의미를 터득하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선물 대신 돈을
준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애초에 자녀들이 돈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돈은 결코 애정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애정의 표시이어야 할 선물
대신 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32.음식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은 곧 신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지 먹기만 하는 인간은 가치가 없다
  유태인들은 매일 식탁에서 하나님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식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식사는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행위이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매일 매일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식사 때마다 잊지
않고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루를 무사히 끝맺게 되었음을
저녁식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안식일인 금요일 저녁에는 세 시간
정도 걸려서 요리한 고기 등을 차려 놓고 역시 세 시간 동안 천천히 식사를
한다. 그리고 식후에는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동물과는 달라서 단지 먹는 것만으로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유태인은 믿고 있다.
  요즈음에는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모든 식구가 함께 모여 식사할 기회가
적어졌고, 식사시간마저 매우 짧아져 식탁에 둘러앉아 얻는 즐거움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유태인 가정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먹는
식사만은 언제나 아기자기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화목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축제 역시 언제나 식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새해-유태력을 1월 1일인데,
보통은 9월-10월에 있다 - 첫날에 하는 식사는 다섯 시간이나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유월절 -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로서, 보통 3월-4월의 일주일 동안 계속되나 - 예는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이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다. 이때 나오는 고기 종류는 대개 세
시간 이상 걸려서 정성껏 장만한 것들이다.
  이런 축제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삼촌, 사촌 등 가족 전원이 한
식탁에 둘러않아 즐겁게 식사를 한다. 식사를 하면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시나
전설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식탁에 둘러앉아 하나님을
축복하며 가족들 간의 굳은 유대관계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자녀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통을 접하며 자라고,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감사드리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인간답게 깨끗한 음식만 먹는다
  식사를 천천히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과, 식탁에서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은 스스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
  유태인들은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여간 신경을 쓰는 게
아니다.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으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인간답게 깨끗한 음식만 먹는 것'이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는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유태인들은 먹어도 되는 음식, 즉 청정한 음식물을 코우샤 푸드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많은 가정에서 엄격하게 그것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어떤 것이 코우샤 푸드인지를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준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코우샤 푸드는 고기를 먹는 방법에서
일반적인 음식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유태인들은 동물은 식용으로 죽일 경우, 파가 고이지 않도록 단번에
죽이고 거꾸로 매달아서 피를 빼낸다. 그리고 피를 완전히 제가하기 위해
고기를 물에 담그고 소금을 뿌린 다음 30분 정도 놓아둔다. 소금이 남은 피를
말끔히 빨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손질이 끝난 고기라야만 먹는 것이 허용된다.
  이것은 본디 성경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것인데, 노아의 홍수 때까지는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다음 방침을 바꾸어 인간이 육식하는
것을 허용했다. 단, 피가 섞인 고기는 먹지 말며 생식은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여졌다. 유태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가르침을 지키고 있다.
  음식물에 대한 계율은 매우 까다로워서, 네 발을 가진 동물은 위가 두 개
이상 있어야 하고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진 것만을 먹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가 하나인 돼지나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말은 먹지 못한다.
  또한 물고기는 비늘이 있어야만 허용되기 때문에, 뱀장어나 미꾸라지를
먹어서는 안 된다. 식육조인 독수리도 못 먹는다. 그리고 새우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나님은 가르치고 있다.

  어린이들은 음식물을 통해 '인간다움'을 자각한다
  뉴욕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나의 큰딸아이가 텔레비전 광고에서 본 빵이 마음에 들어 스쿨버스
안에서 남자친구에게 그 빵을 먹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남자친구는 '그 빵을 먹으면 너는 유태인이 아니야'라고 단언했다. 큰딸아이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빵은
라드(돼지기름)를 써서 구운 것이었다. 그 남자친구는 돼지가 코우샤 푸드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내 친구의 일곱 살된 딸아이가 요코하마로 소풍을 갔다오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나 백 엔 손해보았어."
  친구는 영문을 몰라 자초지종을 물었다.
  "친구들은 모두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는데, 나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다른 것을 샀거든. 그런데 그 속에 조금만 새우가 들어 있지 뭐야.
그래서 아까웠지만 버렸어."
  친구의 딸아이는 새우가 유태인에게 금지된 음식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태인들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음식물을 통해서 '유태인다움'뿐
아니라 '인간다움'을 배운다.
  옛날에는 일본에서도 네 발 가진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지만, 요즈음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코우샤 푸드는 우리 유태인들만의 종교적 계율일
뿐이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예로부터 먹는 행위 자체를 종교와 관련시킨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하나님을 축복하며 가족들 간의 굳은 유대관계를
재확인한다. 그럼으로써 자녀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통을 접하며
자라나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감사드리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33.성문제는 사실만을 간결하게 가르친다
  성에 대해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유태인에게 있어서 섹스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4장에
'아담이 그 아내 화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카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라고 인류 최초의 성행위가 간결하게
씌어 있다.
  이 구절 중에 '동침하였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섹스를 한다'와 '상대를 안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 진정으로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리스도교인들처럼 섹스에 대해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것이므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탈무드>에도 '섹스는
자연의 일부, 부자연스러울 까닭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4-5세 때부터 섹스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부모에게 묻는다. 동양의 부모들은 자녀로부터
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태인 부모들은 '섹스=자연'이란 사고방식을 자녀들의 성교육에도
그대로 적용시킨다. 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더듬거리거나 얼굴을
붉힌다든지, 혹은 화를 내는 일이 결코 없다. 성경에 씌어 있는 사실만을
간단명료하게 자녀들에게 전할뿐이다.

  사실대로 말해 주면 쓸데없는 망상을 하지 않는다
  성에 대해 감추거나 공연히 주저하는 것은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불필요한 흥미를 품게 하는 역효과밖에 내지 않는다. 어린이들은 그런 때에
'비밀스런 냄새'를 맡게 되며, 그것에 대해 집착한 나머지 본래의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는 동시에 괴상한 일들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질문 받지 않은
것까지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만, 만약 질문을 받았다면 거짓말로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무슨 일이든 사실대로 솔직히 이야기해 주면,
어린아이들은 절대로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성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대로 얘기해 주면 공연한 상상력을 발동시킬 여지가 없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이상의 일들은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도 어린이들의 섹스는 자연 그대로 맡겨둔다. 어린이가
자위행위를 하더라도 못 본 체한다.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키부츠에서는 아홉 살 미만의 어린이들은
자위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주의도 받지 않지만, 아홉 살이 되면 비로소 '남들이
모르게 하라'고 타일러준다고 한다.
  그리고 여섯 살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장난을 목격한
교사가 '네 몸에 하라'고 간단히 타이르자, 그 후로는 절대 그런 장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이와 같이 섹스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
자녀들이 섹스와 관련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간단하게 주의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유태인들은 흔히 '5분 동안에 끝낼 수 있는 말이 아니면 아예 꺼내지도
말라'고 말한다. 즉 무슨 말이든지 간에 간단 명료하게 하라는 경고인데, 이와
같은 유태인의 사고방식은 아이들의 성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포인트!
  성에 대해 감추거나 공연히 주저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불필요한 흥미를 품게 하는 역효과밖에 내지 않는다. 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그대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주도록 하라.

  34.어릴 적부터 남녀의 성별을 자각시킨다
  '할례'는 유태인이 되는 의식
  유태계 화가 마르크 샤갈의 초기 그림 중 '할례(1909년 제작)'라는 작품이
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기 전후 '혼례(1909)', '부부(1909), '성가족(1910)'
등 유태인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리얼하게 묘사한 작품을 잇따라 발표했다.
  할례란,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결혼식 못지 않게 중요한 행사로서, 생후
8일째 되는 날 남자아이의 페니스 표피를 잘라 버리는 의식이다. 그럼으로써
일찍부터 자녀에게 남녀의 성별을 명확하게 자각시키는 것이다.
  할례의식은 다음과 같이 행해진다.
  아기가 태어난 지 8일째가 되면, 그 아기의 형제 자매는 물론이고 이웃이나
친척들을 불러 그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먼저 아버지가 한 입 가득 술을
머금고는 솜 조각에 술을 뿜는다. 그러고는 그것으로 아기의 입을 적신다.
이것은 아기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알코올로 마취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아직 신경이 덜 발달된 만큼 통증을 느끼지는 못한다.
  할례의식을 행하는 사람을 '모헬'이라고 일컫는데, 모헬은 자신이 비장하고
있는 특수한 칼로 남자아이의 표피를 자른다. 의식이 끝나면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축하해 주는데, 이때 아이의 엄마는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통이다.
  할례의식을 치르지 않은 남자아이는 유태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은
유태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한 가족이 되는 할례의식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가 여자일 경우는 교회에서 명명식을 하는 것으로
할례의식을 대신하며, 남자아이 때처럼 축하파티를 벌이지는 않는다.
  구약성서에는 할례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씌어 있다.

  너희들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은 너희 자손이 아닌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는 순수한 종교적 의식이지만, 최근에는 위생적 측면에서 유태인이 아닌
사람도 생후 즉시 이와 같은 수술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렸을 때 표피를
제가함으로써 아이가 성장한 다음 포경 따위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등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남성의 권위를 자각시키는 유태인의 성인식
  유태인 남자는 장남일 경우, 생후 30일째 되는 날 또 다른 의식을 치뤄야
한다. 그리고 13세가 되면 남자에 한해서 '바알 미츠바'라고 하는 성인식을
치르게 되는데, 바알 미츠바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열세 번째 생일날 다음에 돌아오는 안식일을 택해 행해지는 이 의식은,
어린이가 교회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성경을 읽고, 집에 돌아와서는 친척,
친구들을 초대하여 축하 파티를 여는 것이다.
  유태인 사회는 이처럼 철저하게 남성의 권위가 존중되는 사회이다.
남자아이들은 이러한 의식을 치름으로써, 남자로서의 힘과 권위를 자각하면서
성장한다.
  이렇게 해서 성장한 남자가 한 가정을 이룰 경우, 그는 가정의 중심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안정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의 기초는 생후 8일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치름으로써 다져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포인트!
  할례는 순수한 종교적 의식이지만, 최근에는 위생적 측면에서 유태인이 아닌
사람도 생후 즉시 이와 같은 수술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렸을 때 표피를
제가함으로써 아이가 성장한 다음 포경 따위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등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35.텔레비전의 폭력장면은 보여주지 않지만, 다큐멘터리 전쟁영화는 꼭
보여준다
  부모가 신경만 쓰면 텔레비전의 악영향은 없다
  텔레비전의 대량보급으로 화면을 통한 폭력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텔레비전의 폭력장면을 모방한 젊은이의 탈선 이야기가
이따금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텔레비전의 폐해를
실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집 아이들은 텔레비전의 악영향으로부터 거의 안전지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여덟 살인 둘째딸아이와 여섯 살인 아들에게는
안식일을 제외한 다른 날에는 오후 여섯 시 반까지만 텔레비전 시청을
허락한다. 그것도 어린이 프로에 한정되며, 혹시 그들이 어른 프로를 보고
있으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위치를 꺼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집에선 폭력장면 따위가 어린이 시청 시간에 화면을
비치는 일이란 절대로 없다.
  다만 폭력적이라 할지라도 다큐멘터리는 예외이다.
  우리 유태인은 지난날 셀 수 없이 많은 박해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에 의한 대량 학살은 우리 유태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조부모는 물론이고 백부 내외가 모두 학살당해 지금은
한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일본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 씨 가족 역시 대부분
아우슈비츠에서 몰살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11형제나 되었지만, 그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형제와 자손들이 학살당했던 것이다.

  '사실'과 '픽션'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준다
  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스의 학살 역사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남아있다.
우리 집에서는 이와 같은 종류의 기록영화만은 폭력적인 장면이 있더라도
자녀들이 보는 것을 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을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물어온 적이 있다.
  "우리에겐 사촌들이 없나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단다. 우리 친척은 모두 학살당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없단다."

  '사실'과 '픽션'을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있다면 자녀들은 그 어떤
폭력장면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폭력장면이 자녀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그들이 '사실'과 '픽션'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 가는 동포의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것만큼 잔인한 것은
없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자녀들에게 그러한 비참한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우리집 큰딸아이는 텔레비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영화는 이따금
본다. 그러나 이제는 사실과 픽션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 애 재량에 맡긴다. 이것은 보고, 저것은 보지 말라고 일일이 간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조건 '텔레비전은 나쁘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텔레비전과
현실의 차이점을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주지 못한 부모 쪽에 더 큰 책임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무조건 '텔레비전은 나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텔레비젼과
현실의 차이점을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주지 못한 부모 쪽에 더 큰 책임이
있지 않을까.

  36.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헛된 꿈을 갖게 하지 않는다
  유아 때부터 합리적인 사고를 심어준다
  유태인은 합리주의자이다. 이를테면 <탈무드>의 해석을 둘러싸고 장장 몇
시간에 걸쳐 토론을 할 때라도, 서로가 이치를 따져가면서 전개해 나가는 것을
조건으로 삼고 있다. 이런 경향 때문에 더러는 '유태인은 추상적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우리 유태인은 합리적인 사고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의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있다'는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때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지는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자녀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한낱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자녀들에게 죽은 뒤에 '천당'에 가느니 '지옥'에
떨어지느니 하는 따위의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이야기를 해서 자녀들에게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합리주의적인 환경 아래에서 성장한 유태인 가운데,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이나 매독반응의 발견자인 와세루먼, 그리고
혈액형을 발견한 란드슈타이너 등의 과학자들과, 냉철한 현실 감각으로 세계
제일의 금융 재벌이 된 로스차일드 일가 등이 탄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합리주의 신봉자인 유태인들은 이 세상에 '기적'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는 온통 기적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기적들은 모두 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들뿐이다.
즉, 이 세상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은 한 가지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이다.

  모세의 기적도 과학적으로 입증된다
  한 가지 예로 모세의 기적을 들어보자.
  노예의 몸인 유태인들을 이끌고 사막으로 도망친 모세가 홍해에 다다랐을 때,
앞은 바다가 가로막고 뒤쪽에서는 이집트 군사들이 추격해 오고 있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출애굽기에는 그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밀 때 여호와께서 큰 돌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

  홍해가 둘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건너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백 년에 한
번쯤 강풍으로 인해 조류가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해 홍해가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큼 얕아지는 경우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기적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유태인들은 모세가 일으킨 이 현상을 오로지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진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기적이 헛된 공상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이처럼 기적마저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유태인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는 일곱 살 때 친구에게, '인간이 죽으면
하늘의 어디엔가로 올라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사실을 죽기 직전까지 믿었다고 한다.
  또 음악가인 다리우스 미요는,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 소피로부터 '그림 같은
광경'이라는 터키의 추억담을 듣고 옛날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는 밑도끝도없이 지어낸 허황된 옛날
이야기보다는, 현실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우리 유태인들은 기적과 같은 공상을 부정하고 현실성이 짙은 것을 통해서만
이론을 관철하려고 에너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합리주의적인 교육은
수많은 과학자, 사업가, 음악가, 미술가 등을 배출하는 토대가 되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서 공상적인 이야기를 했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 이런 번거로움을
생각해서라도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 아닐까.

  이것이 포인트!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도 밑도끝도없이 지어낸 허황된 옛날
이야기보다는, 현실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제 3장. 의를 기른다
  37.자녀를 꾸짖을 때는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꾸중은 부모로서의 의무
  "당신들 유태인들은 신앙심이 깊으니 자녀를 꾸짖을 때,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고 말함으로써 착한 일과 나쁜 일을 구별시키지는 않습니까?"
  이 말은 내가 흔히 듣는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대답으로 일관한다. 유태인들은
자녀들을 꾸짖거나 타이를 때, 절대로 하나님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가정교육이란 한마디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인 만큼 거기에는 좋으냐,
나쁘냐의 기준 이외에는 다른 말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뿐만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그런 짓 하면 못써!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라는 말로 자녀들을 꾸짖는데, 이는 옳지 못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꾸짖을 일이 있다면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꾸짖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은 부모들이다.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꾸짖는다는 것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녀들을 꾸짖을 때는 절대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만큼 하나님 핑계를 대거나 다른 이유를 둘러대며 부모로서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초 인간적인 덕보다 현실적인 덕을 행하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추리소설 중 '랍비 시리즈'라는 것이 있다. 이
소설은 유태계 작가인 해리 케멜만이 쓴 것으로서, 그의 첫 작품인 <화요일에
랍비가 격노했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유태인의 종교는 매일 매일 의식하면서 선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더욱이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인간적인 덕이지 초인간적인 성인의 덕은 아니다.

  이것은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스몰이란 랍비가 한 말이다. 선과 정의는
인간으로서 살아나가기 위한 조건으로, 날마다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만큼 구태여 하나님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현실세계에 적용하는 착실한 방법을
우리들 스스로 알아서 실천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잘못을 꾸짖을 때도 그 목적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탈무드>에는, 대홍수 때 선이 노아의 방주에 함께 타려고 했지만 '무엇이든
짝이 있는 것만을 태워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거부당함으로써, 짝이 되는 악을
찾아 함께 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선과 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언제나 상반된 위치에 놓여 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먼저 그것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올바른 가치 기준을
심어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꾸짖는다'는 것은 선과 악 중 한 가지 기준만을 부모의 책임 아래 자녀에게
심어주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포인트!
  잘못을 저지른 자녀들을 꾸짖을 때는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해야
하며, 절대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안 된다. 선과 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언제나 상반된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먼저
그것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38. 최고의 벌은 침묵이다
  '침묵'이 매보다 효과적이다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줄 것인가-이것은 가정 교육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어떻게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예를 들면, 자녀들이 관여해서는 안 될 일에 나섰을 때, '그런 일에 나서지
말라고 했지'라며 말로써 꾸짖는 경우도 있겠고, 조금 심한 경우에는 매질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어느 정도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벌인데, 벌은
미워서가 아니라 예방적인 차원에서 절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이것을 잘못 다스리게 되면 부모의 경고나 꾸중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기 십상이다.
  이런 사정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유태인
어머니들 역시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을 만큼 체벌의 강도가 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학교나 외출에서 돌아와 책가방이나 입었던 코트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면 큰 소리로 꾸짖는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을 경우에는
엉덩이나 뺨을 때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유태인 어머니들은 이런
체벌보다 한 차원 높은 방법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이라는
무기이다.
  언젠가 겨우 세 살밖에 안된 딸아이가 제 친구한테서 받은 유리컵을 들고
다니면서 장난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말했다.
  "얘야, 깨뜨리기 전에 엄마에게 오렴."
  "안 깨뜨려요."
  그러고는 유리컵을 건네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내 단념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랬더니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쨍그렁'소리와 함께 마루에 떨어진 유리컵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나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봐, 엄마가 말했잖니. 너하고는 이제부터 말도 하기 싫으니 너도
엄마한테 말 걸지 마!"
  그때부터 30분 동안 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이처럼 의사 소통의 수단인 대화를 끊는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최대의 벌이
아닐 수 없다. 즉, 자녀들의 존재를 아주 무시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매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면서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아무때나 이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로써 타일러도 안 듣거나, 부모를 모욕하는 언동을 하는 등
가정교육의 근본에서 벗어났을 최악의 경우에만 비상수단으로 써야 하는
'무기'인 것이다.

  침묵은 부모에게도 반성의 기회가 된다
  한편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부모 자신에게도 매우 가혹한 벌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말이 많은 민족이라는 딱지가 붙었으리만큼
대화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는 '입'이나 '말'에 대한 경구가 수없이 많은데, '이스라엘은
누에이다. 유태인은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인다'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누에가 항상 뽕잎을 먹고 있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다, 즉 유태인은 언제나
말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가정 교육에
불충실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이렇든 '침묵'이 보통 벌과 다른 점은, 벌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에게
독특한 심리작용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가정교육에 불충실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39. 협박은 금물이다, 벌을 주든 용서를 하든지 하라
  부모의 애매한 태도는 자녀들의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우리 유태인들은 '건강'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깨끗한 코우샤
푸드만을 먹으며,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을 종교적 계율로까지 삼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신체의 건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의 건강이다. 마음의
건강이란, 육체적으로 말하자면 찌뿌드드한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녀들로 하여금 항상 우울하거나 부모의 눈치만 살피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처럼 자녀들의 솔직하고 그늘지지 않는 마음씨의 소유자로 키우는 최대의
요점은 자녀들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고 명쾌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녀들의 마음을 올바르고 건강하게 만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인 것이다.
  유태인의 격언에 '자녀들을 협박해서는 안된다. 벌을 주든 용서하든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격언이야말로 자녀들의 마음에 건강을
심어주는 최상의 조언이라 하겠다.
  유태인들은 아이들에게 벌을 주려고 결심한 이상 도중에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반면 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고 용서해
준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일곱 명의 충실한 제자가 있다. 그들은 스승인
프로이트에게 주피터의 머리모양을 조각한 고대 로마의 복제품 반지를 선물로
받고, 합심해서 정신분석학계를 지도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제자 중 한
사람인 모토 랑크가 프로이트 학파로부터 탈퇴하여 스스로 한 학파를 만들었다.
랑크는 프로이트가 온 정열을 쏟아 정신분석을 훈련시킨, 프로이트에게는 마치
자식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랑크의 배신에 대해서
'나는 모든 것을 용서했다. 이제는 끝이 났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 일화는 비록 스승과 제자라는 특수한 관계이긴 하지만, 명쾌한 판단을
내린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은 명쾌한 결단이 사제지간이 아닌 부모자식 간에 일어났다면
자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자녀들은 벌을 주든지 용서해 주든지, 한
가지를 선택하는 부모의 명쾌한 태도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고 건전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벌을 주는 것인지, 용서해 주는지 분간할 수 없는 흐릿한 태도를
취한다면, 자녀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협박은 자녀들의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비근한 예이지만, 자녀가 그릇을 깨뜨렸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앞으로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가만 두지 않겠어'라고 위협을 했다면 아이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분명 잔뜩 겁에 질려 불안한 심리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자녀들에게 협박조로 말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도 벌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녀들의 마음속에 불안감만 심어줄 뿐 아무 이득도 없다.
  부모의 미지근하고 불확실한 태도나 말의 이면에는 은근히 자녀들에 대한
협박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협박은 부모가 자녀들의 잘못에 대한 명쾌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초조감이 변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동양 어머니들의 '잔소리'는 자녀들의 행동에 큰 걸림돌이 된다. 물론
나쁜 의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겠지만, 언제나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들을 솔직하고 그늘지지 않는 마음씨의 소유자로 키우는 최대의 요점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고 명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미지근하고 불확실한 태도나 끊임없는 잔소리는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 자녀들의 잘못은 매로 다스린다
  자녀를 때릴 때는 구두끈으로 때려라
  우리 유태인들은 자녀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지혜의 근원인 머리를 제외한
다른 신체 부위에 매질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도, 아이들이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서 엉덩이나 뺨을 때리며 꾸짖는다.
  내가 아는 성미 급한 친구는, 아이가 잘못을 했을 경우 길거리든 식당이든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때리기도 한다.
  유태인들은 부모의 손도 입(말로 꾸짖는 거)이나 눈(침묵으로 꾸짖는 것)처럼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육적 도구'라고 생각한다.
  특히 손은 눈이나 입과는 달리 실제로 육체적 '고통'을 주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게 하는 효과가 크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매질은 자녀들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고쳐주는 데 절대 필요하며, 동시에
자녀들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의 잠언 13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어떤 자녀이건 응석을 마냥 받아주며 방임하는 것은 부모된 자의 책임을
다하지 것이 못 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만이 자녀들의 잘못을 매로 다스린다는
뜻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언 22장 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29장 15절)
 
  자녀들을 길들이는 데 있어 매는 꼭 필요한 것이고, 나아가서 그것을 통해
지혜까지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 말들이다.
  물론 채찍으로 노예를 때리듯이 자녀들을 다루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상징적인 의미로서, 부모의 손으로 직접 때린다는 것은 미움이 아닌 '사랑의
채찍'임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스킨쉽인 것이다.
  한편 유태인의 격언 중에 '아이들을 때려야 할 때는 구두끈으로 때리라'는
말이 있다. 즉 매를 때리는 목적은 아이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음을 바로잡는데 있으므로 아이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심한 매질은 피하라는 뜻이다.

  신념이 없는 부모는 자녀들을 때리지 못한다
  요즘은 어느 나라에서건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자녀들이 잘못을 했더라도 매를 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것 같다.
  그렇지만 매질이 자녀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에는
예외이겠지만, 잘못을 저지는 자녀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수단일 때는 결코
야만적이라 할 수 없다. 사용하는 시기와 정도를 분별할 줄만 안다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부모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서 매를 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매를 맞는
자녀들도 부모의 손길에서 진심 어린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편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매를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모에게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가치관이 있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을
부모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매를 포함한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녀를 옳게 가르치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신의 신념에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자녀들을 어정쩡하게 다스리는 부모가,
자녀들만큼은 신념 있는 확고한 사람으로서 성장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바람이다. 즉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 교육 방식과는 무관하다. 자신감을
상실한 부모만이 그저 자녀들을 먼발치서 지켜볼 따름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의 응석을 받아주며 방임하는 것은 부모된 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못
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 교육과는 무관하다. 자신감을 상실한 부모만이 그저
자녀들을 먼발치서 지켜볼 따름이다.

  41. 어떤 일이든 제한된 시간 내에 마치는 습관을 길러준다.
  시간의 소중함을 깨우쳐준다
  유태인 가정의 자녀들은, 가장인 아버지가 귀가하기 전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 이유인즉 아버지가 귀가해서 샤워를 끝내는
즉시, 가족 모두가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기 위함이다. 가정의 저녁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유태인의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순서와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끝마치는 훈련을 철저하게 받으며 자란다. 그것은 비단 샤워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에 그대로 적용된다.
  금요일 일몰 때부터 시작되는 안식일 날, 자녀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즉시
숙제 등을 재빨리 마친 다음 목욕을 하고는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모든 일과는 어머니가 일몰과 동시에 양초에 불을 켤 때까지
마치도록 정해져 있다.
  이런 까닭으로 자녀들은 매일, 또는 매주 시간과 승부를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을 엄수함으로써 자녀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한정된
시간 안에 끝내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 가는 것이다.
  그 밖에 유태교의 축제행사 때에도 시간의 중요성을 통감하게 하는 시스템이
있다.
  예를 들면 봄철에 치르는 가장 큰 축제인 '유월절(Passover)'에는 빵을 못
먹게 되어 있다. 그날에만 먹는 딱딱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샌드위치를 대단히 좋아하는 우리 집 아이들은 이것이 큰 고통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성한 행사인 만큼, 축제가 계속되는 7일 동안은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해서 유태인 자녀들은 시간의 중요성을 거의 생리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규율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은 기독교의 영생이나 불교의 윤회 사상을 믿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부심 한다.

  시간관리가 공부의 기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유태인 소년들은 열세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때 주로 손목시계를 선물로 준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다짐을 주기 위해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는 사고방식은 유태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오늘 할 일을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서를
상세하게 짜는 습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획에 맞춰 일을 확실히
해치웠을 때는 일종이 쾌감마저 느낀다.
  흔히 동양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나는 그 원인이 자녀들이나 부모가 사전에 시간을 제대로 관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공부 계획표를 짜기는 하지만, 이내
그것이 무리인 것을 알고는 몇 번씩 변경을 하는 동안에 싫증을 느끼고 만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하면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책상에 모래 붙들어 앉히려고 한다.
이것은 곧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부모는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떻게 시간을 유효 적절하게
이용하는가 하는 방법을 깨우쳐주도록 해야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리듬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는 30분 이내에 끝내도록 시간을 정해 놓고, 제한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우물거린다면 사정을 보지 않고 모두 치워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30분이라는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그 시간 안에 식사를
끝마치는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된다.
  나는 아침에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학교에 늦지 않으려면 정해진
시간 내에 세수하고,식사하고, 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재빨리 끝내야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볼 시간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즉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더욱 중요한 일을 등한시하는 따위의 나쁜
버릇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어렸을 때의 시간관리가 가장 능률적인 공부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규율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유태인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부심 한다.
 
  42. 가족 모두가 모이는 식사시간을 활용한다
  식당에는 텔레비전을 두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잘 아는 일본인 가정에 저녁식사를 초대받았을 때 대단히 기묘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집 가족들과 우리 부부가 식탁에 둘러앉아 막 식사를
하려던 때였다. 초등학교 4년생인 그 집 장남이 벌떡 일어나더니 식당 한쪽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을 켜는 것이었다. 마침 텔레비전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 광경이 나에게는 참으로 기묘하게 생각되었다. 우리 집의 경우 식사시간에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홈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마침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화면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시각 아마 다른
집에서도 이와 똑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의 일본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가족의 일체감을
느끼는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식사시간은 자녀들의 마음의 양식이다
  우리 유태인은 구약성서에 의해 굳게 뭉쳐져 있다. 또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태인에게 있어 식탁은 무엇보다도 신성한 자리이기 때문에 이런
경험은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유태인들이 식사시간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이유는, 텔레비전은 한갖
오락물일 뿐이지 가족 전체를 하나로 묶는 도구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텔레비전 프로는 다양해서 가족 모두가 공통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가족이 텔레비전 프로를 화제로 삼는 것은 '회화'는 될 수
있을지언정 대화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역시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간의 대화의 단절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듯한데, 그 한 가지 원인은 식당에 텔레비전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식사시간은 한 가족이 모여 서로 마주보면서 연대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낮 동안 아버지는 직장에서, 자녀들은 학교에서, 그리고 어머니는 가정에서
활동하다 한 자리에 모이는 유일한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가족들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인 동시에, 교육적으로 보더라도 유익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 가정에서는 이러한 귀중한 시간에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봄으로써 가족의 유대관계를 흐려놓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것이 포인트!
  식사시간은 한 가족이 모여 서로 마주보면서 연대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인
동시에, 교육적으로 보더라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다.

  43. 외식을 할 때는 어린 자녀를 데려가지 않는다
  젖먹이는 외식할 때 데려가지 않는다
  부모들이 음식점에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가족이 정답게, 늘 머리를 맞대고 사는 자기 집과 다른 분위기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음식도 음식이려니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겨우 두세 살밖에 안 된 젖먹이들까지 데리고 온다는
사실이다.
  한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유태인들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 또래의
어린이들이 밖에서 식사하는 즐거움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에게는
외식이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경우,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거나 돌아다니며 수선을 떠는 등 다른 손님들에게 폐를 끼칠
것이 틀림없다. 때로는 음식을 흘리거나 그릇을 깨서 종업원이나 주인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까 봐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진짜 이유는, 밖에서 식사를 하는 행위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외식을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는 생일 등 축하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이다. 그 외에 집에서는 먹을
수 없는 특별한 음식이 먹고 싶어서일 경우도 있을 것이고,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해서 외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어른의 세계에서는 어느 경우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해되지 않는 것들 뿐이다.
그들에게는 평소와 다른 상황에서 식사하는 것만이 흥미로울 뿐, 외식을 통해
그 어떤 기쁨도 얻지 못한다.
  이처럼 그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기 전까지 외식은 아이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어른들 역시 아이들 때문에 신경을 쓰느라 외식의
즐거움은커녕 기분만 망치게 될 것이 뻔하다.
  어른에게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어린이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유태인들의 상식이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외식을 할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좋다.

  남에게 협조하는 것은 '자기 희생'이 아니다
  <탈무드>에 '날마다 오늘이 최후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하루 하루,
한순간 한순간을 전 생애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내세'라든가, '저
세상'을 믿지 않는 유태인들의 생활신조이다.
  그러므로 외식을 즐기는 것도 우리들 생애의 귀중한 한순간이며,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이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약간 과장된 말 같지만, 외식에 어린이를 동반하는 것은 유태인의
생활 방법에 역행하는 셈이다.
  음식점에 어린이를 데리고 가서 다른 손님에게 폐를 끼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이지,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철저한 개인주의자인 유태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자신에게 충실한 행동이 바로 남과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동양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다른 사람과의 협조는 곧 자기 희생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견해도 우리 유태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에게 충실한 행동이 바로 남과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44. 한 살이 될 때까지는 부모와 함께 식탁에 앉히지 않는다
  식탁은 인간형성의 장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녀들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교류하는 최초의
자리가 바로 식탁이다. 그것은 식탁에 둘러앉아 가족 전체가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을 때, 어른들은 물론이고 비록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중에 '가족'이라는 집단 의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느낌은
어린아이의 연령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 예로, 전혀 말을 못하는 어린아이와 조금이라도 말을 할 줄 아는
어린아이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경우, 분위기를 인식하는 차이는 아주
다르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무리 식탁이 한 가족이 교류하는 데 있어 절대 중요한 자리라
할지라도 자녀가 한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는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만, 특히 젖을 먹는 유아인 경우, 간혹 가다가 식탁의 침략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가족과 별도로 식사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 경계를 첫 번째 생일날로 잡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아이는
비로소 부모 형제들과 나란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된다. 그쯤 되면 겨우
어른이나 다 큰 형제들의 식사법을 흉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부터 한참 동안 아이는 식탁의 불법 침입자 처지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그랬듯이, 아이들은 차츰 부모 흉내를 내면서
식탁에서의 기본 예절을 배우므로 어른들은 사소한 실수쯤은 눈감아주면서
아이가 식사 예절을 터득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협력해야 한다.
 
  먹는 방법에서도 '인간다움'을 고려한다
  유태인들은 그 행위로 보아서는 인간도 동물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에 특히 주의한다.
  동물이나 인간의 공통적인 행위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섹스와 먹는
일이다. 그러나 섹스도 그렇지만, 먹을 것이 눈앞에 있다고 해서 동물처럼
무조건 입에 넣거나 손으로 집어먹는다면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젖을 떼게 되면 포크나 나이프, 혹은 젓가락이나 숟가락 따위의 도구를
사용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인간답게 먹는 첫 걸음이라 하겠다. 즉
이것이야말로 동물과는 구별되어지는 첫 단계인 셈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와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에서
벗어나기 위한 초보 훈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비로소 아이에게도 가족의식이 형성된다. 유태인들이
식탁을 인간 형성의 자리로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포인트!
  아무리 식탁이 한 가족이 교류하는 데 있어 절대 중요한 자리라 할지라도
자녀가 한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는 동석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45. 편식 버릇을 방관하면 가족이란 일체감을 잃게 된다
  '이 음식점에는 이 메뉴밖에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구미인들이 '유태인 어머니'라는 말에서 우선
연상하는 것은 '교육 엄마', 즉 교육에 열성적인 엄마이고, 그 다음이 식사 때
자녀들에게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권하는 어머니이다. 사실 이런 지적을 받을
만큼 유태의 어머니들은 귀찮을 정도로 자녀들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한다.
  구미나 동양에서는 흔히 '치즈는 프로틴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라거나
'시금치는 철분이 많은 식물이기 때문에'라는 따위의, 주로 영향학적인 지식을
과시하면서 자녀들이 싫어하건 말건 먹을 것을 강요하는 엄마들이 많다.
  그런데 유태인 엄마들은 '먹어라, 많이 먹어라'고 권하긴 하지만 다른 나라
어머니들처럼 영향학적 가치까지 들먹이지는 않는다.
  소박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어린이들에게는, 특히 젖먹이에게는 '성장' 이
첫째 요건이다. 더욱이 모든 음식은 성장의 필수 요건이므로, 성장한 다음 어떤
생활환경에 처하더라도, 또 어떤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남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는 확고한 '체력'을 만들어주는 것이 부모된 자의 의무라고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믿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을
가려서 먹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건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야, 안 먹을
테야'라는 말을 못 들은 척 묵인해 버린다면 그만큼 자녀들의 올바를 성장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행동이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물론 어린이들 자신은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먹는 것이 다르므로 하나
하나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해 준다 하더라도 이해할 리가 없다. 그래서
'많이 먹으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것이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유일한 방법인 까닭이다.
  음식점에 갔을 때, 어린이들이 간혹 자기 식성에 맞지 않는다며 먹기를
거부할 때가 있다. 이럴 경우에는 '이 음식점에는 이 메뉴밖에 없으니 정
싫으면 너 혼자 다른 음식점에 가서 먹으라'고 딱 잘라 말하라. 그러면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먹게 될 것이다. 또는 참을성 있게 '아이 착해, 이걸 먹으면
건강해진다'라고 타이르면 대개의 어린이들은 왕성하게 먹게 되므로 편식
습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초콜릿이나 과자 따위의 자극성이 강한 것들은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결코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가족을 하나로 만든다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이 생기게 되어
음식이 맛있느니 없느니 하며 가려먹는 습관이 생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인간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짐승들처럼 단지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가족이 정답게 한 자리에 모여서 연대감을 결속하는, 나아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신성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의 편식 습관을 방임하는 것은 결국 가족의 일체감을
깨트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셈이 된다. 어쩌면 이런 위험성이 예상되기 때문에
유태인의 어머니들이 편식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기를 먹는 부모 옆에서 자녀들이 생선을 먹는다면, 한 가족이 따로 따로
생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광경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음식은 되도록 엄마가 정성 들여 손수 만든다. 엄마가
직접 만든 음식은 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함과 동시에,
자녀들에게 식사라는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렸을 때의 편식 습관을 방임하는 것은 결국 가족의 일체감을 깨뜨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편식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46.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위생상, 외견상 목적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몸이 깨끗하면 마음도 깨끗해진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손을 씻는 것뿐 아니라 자기 몸을 청결하게
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의무이자 최소한의 예의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마찬가지이겠지만, 유태인
가정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손을 씻고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는 절대로 입을 떼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엄격히 가르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축복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기 위함이다. 즉 우리들 유태인에게 있어 손을 씻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하는 신성한 의식이며, 그러므로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신성한 의식은 비단 식사때 뿐만이 아니라 교회에 갈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출입구에는 물을 담아놓은 그릇이 있어 그곳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손을 씻으면 마음도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의 일이다. 이스라엘이 히렐이라고 불리는 랍비의
대승정이 있었다. 그는 손꼽히는 랍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로서,
그리스도의 말은 사실은 히렐의 말을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이 위대한 랍비 히렐이 어느 날 거리를 황급히 걷고 있었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었다.
  "좋은 일을 빨리 하고 싶어서 서두르고 있네."
  제자는 좋은 일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스승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히렐은 공중 목욕탕으로 들어가더니 온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에게 히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곧 선행이라네."

  나는 수시로 우리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한마디 덧붙이곤 한다.
  "집 안을 청소하거나 교회를 깨끗이 하는 것도 꼭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어.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들 몸부터 청결히 하거라. 그것이 바로 선행의
시작이니까."

  청결은 과학적, 종교적 의미가 있다
  우리들 유태인의 이와 같은 청결벽은 예로부터의 전통이며,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까지 생기게 되었다.
 
  중세 때 페스트가 퍼져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그때 유태인이 이
무서운 페스트를 만연시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왜냐하면 오직 유태인만이 이
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유태인만이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그 당시 그리스도들은 평소 목욕하는 습관이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모르게 돈은 감추려면 비누 밑에 숨겨라'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로 목욕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실제로 비누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유태인만은 그 당시에도 목욕을 자주 하는 습관이 있었고,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에도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은
종교상의 규칙이기까지 했다. 이 청결함이 페스트로부터 유태인을 구해 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소문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유태인이
페스트균을 우물에 넣었다는 소문이 퍼져 박해를 받게 되었다.

  우리 유태인들은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민족이며, 또한 현실주의적 생활
태도를 계속 유지해 온 민족이기도 하다.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연관된다는 신앙은, 동시에 건강이나 위생이라는 과학적인 이유에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건강에 관한 생활의 지혜가 고대 유태인들에 의해서 신앙으로까지
승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습관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활 속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같이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청결의 필요성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경우에도, 손을 씻고 샤워를 하는 것은 질병을 예방하고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해준다. 그럼으로써 자녀들의
마음속 깊이 그런 습관이 보다 튼튼하게 뿌리내리도록 노력한다.
  또 현대생활에서는 이러한 의식적인 습관을 통해서 깔끔한 태도와 경건한
기분으로 사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에게 있어 손을 씻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하는 신성한 의식인 동시에
건강이나 위생이라는 과학적인 이유에도 부합된다. 이러한 의식적인 습관을
통해서 깔끔한 태도와 경건한 기분으로 사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기를 수도
있다.

  47. 용돈을 줌으로써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인다
  쓰는 것보다 저축하는 습관이 먼저
  유태인 자녀들 중에는 용돈을 넉넉하게 받는 어린이도 있고 전혀 받지 못하는
어린이도 있다. 왜냐하면 어린이에게 반드시 용돈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일상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부모가 알아서 사주던가,
아니면 필요한 만큼 돈을 주면 되므로 그 이상의 돈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초등학생에게는 용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유태인 부모들이 자녀에게 용돈을 준다면, 그것은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여덟 살된 아들이 있는 내 친구는, 아들에게 처음으로 용돈을 주면서 '꼭
필요한 때만 써라'고 했더니, 곧바로 은행에 저금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은행원한테서 '저금을 해두면 이자가 불어 돈이
불어난다'는 말을 듣고 아이가 매우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이자'가 무엇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자기 돈이 무사한가 매주 한 번씩
은행에 들어 확인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유태인 어린이들은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는 습관이 별로 없다. 대개는
용돈은 아껴서 저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어린이가 많다. 다만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얼마간의 돈을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데 용돈을 써도 돼요?'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본 후 돈을
쓰는 자녀들이 많다.
  나의 경우는 아이들에게 미리 용돈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돈이 필요하다고
요구할 경우, 그때마다 필요한 만큼의 용돈을 준다. 이 경우에도 아이들은 쓰고
남는 돈은 반드시 저금한다. 그 대신 가족의 생일 등 선물을 살 때에는 아끼지
않고 필요한 만큼 쓰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돈을 쓸 때는 마음과 일치해야 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항상 '돈을 쓸 때는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친다. 가족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도 친구끼리의 우정의 표시인 것이다.
  유태인 어린이들이 조그마한 저금통에 자선용으로 따로 저금을 하는 마음과,
용돈을 아껴 저축하는 마음가짐은 똑같은 심정에서 출발한다.
  돈이라고 하면 인간적인 정감과는 약간 거리가 먼 차가운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사용 방법에 따라서 얼마든지 인정이 실린 따스함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 유태인들이 특히 돈의 사용 방법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흔히 수전노라고 손가락질 받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돈의
중요성과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격언 중에 '돈이란 벌기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쓰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유태의 어린이들은 '저축'하는 행위에서 무엇보다 돈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의 어린이들은 '저축'하는 행위에서 무엇보다 돈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돈을 쓸 때는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사용 방법에
따라서 얼마든지 인정이 실린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48. 은은 무거워야 한다, 다만 무겁게 보여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내적인 충실을 중요시한다
  대개의 유태인들은 겉치레에 능숙하지 못한 편이다. 아니 경원하고 주저하며,
오히려 싫어한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항아리의 겉모양을 보지 말고 내용물을 보라'는 격언은 유태인들의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내면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겉모양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내면의 추악함을 감추려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나 생활태도는 인간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철저하다. 예를 들어, 번지르한 포장술로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약삭빠른 상혼에 속아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겉모양을 치장하는 데만 집착한다면 아무래도 내면을 충실히 하는 데
소홀하기 쉽다. 즉, 내면이 알차지 못한 사람일수록 겉모양을 적당히 치장하여
마치 속이 꽉 찬 것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이러한 심리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다.

  외면을 도외시하는 만큼 내면에 충실한다
  뉴욕에 살고 있는 유태계 부호 중의 한 사람인 필립 J. 구다스 부인은, '은은
무거워야 한다. 다만 무겁게 보여서는 안된다'라는 말을 처세훈으로 삼고 있다.
  "옷을 구입할 때는 최고급 옷감에 최고의 솜씨로 지은 것을 선택해야 하지만,
야한 색깔이나 유행을 따르는 옷은 절대 입지 않으며, 밍크 코트 같은 최고급
의복은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 해도 입어서는 안된다. 또한 좋은 그림을 벽에
걸어두는 것은 좋지만 손님들 눈에 잘 띄게 거는 것은 피해야 하며, 소녀는
둥근 밀짚모자와 흰 장갑을 끼는 것이 좋다."
  바로 이런 것들이 '무겁게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예컨대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꾸미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남으로부터
공연히 반감을 사지 말라는 뜻이다.
  런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초대 총수였던 네이슨 로스차일드도 당시 신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옷 끝단 장식 등의 치장이나 허례허식을 극단적으로
경멸했으며, 오직 실력만이 전부라고 믿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은이 참무게를 자랑하는 것처럼 내면의 충실에 힘을
쏟는다.
  비근한 예일지 모르지만. 조그마한 명함 한 장에 앞뒤가 꽉 차도록 직함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와 같은 겉만 번지르르한
직함보다는, 남이 인정할 수 있는 실력 함양에 모든 힘을 경주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소박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히고, 눈에 뛰는 행동은
삼가도록 교육시킨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겉모양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내면의 추악함을 감추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소박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히고,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도록 교육시켜야
단다.
 
  49. '내 것' '네 것' '우리 것'을 구별시킨다
  소유권은 명확히 구별한다
  유태인들이 어린 자녀들을 교육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소유권에
관한 것이다.
  소유권이라고 하면 대단한 재산이 연상되는 거창한 말 같지만, 한 가정
내에서, 그리고 비록 한 가족끼리지만 자기 물건 외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 경우, 물건의 소유자를 정하는 데는 다음의 세 가지 부류가 있다.

  1. 내 것(MINE)
  2. 네 것(YOURS)
  3. 우리 것(OURS)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이나 노트 등을 자녀들이 가지고 놀 때는,
'이것은 엄마가 쓰는 거니까 가지고 놀면 안 돼'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비록 형제간이라 해도 쓰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는 '빌려줄래?'하고 동생이나
언니에게 물어본 다음 빌리도록 한다.
  공놀이 등을 하다가 유리창을 깨뜨렸을 경우에는, '이 유리창은 네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라고 스스로 깨닫도록 부드럽게 타이른다.
  한 가족이면서 왜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소유권을 분명히 하느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이 '소유권'문제를 확실히
교육시켜 두면, 그들이 커서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남의 물건이나 공공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 안의 모든 물건을 가족 전체의 것으로 알고 조심성 있게 다루는 어린이가
거리에 함부로 침을 뱉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의 물건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어린이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 장난은 하지 않을 것이다.
  소유권을 인식시키는 것이 결국 아이의 인격을 배양하는 더없이 훌륭한 교육
방법인 셈이다.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새삼스럽게 공중도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예절과 질서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단 2∼3세까지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를 구별해서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린아이라고
해서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한 예로, 우리 딸아이는 두세 살 때까지 관엽식물의 잎사귀를 따서
씹어먹으며 '샐러드, 샐러드' 하고 뛰어 놀았다. 그러면 나는 그 현장을
목격하는 즉시, 딸아이가 보란 듯이 그 화분을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놓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돼."
  비록 어린아이지만 '내 것', '우리 것'의 개념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처럼 유태인 어머니들은 '애들이니 할 수 없다'라는 태도는 절대로 취하지
않는다. 진정 자녀들의 '인격'이나 '인권'을 존중한다면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렸을 때부터 '내 것', '네 것', '우리 것'의 개념을 이해시킴으로써 남의
물건이나 공공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도록 만든다.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50.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은 아이들의 문화적 유산이다
  유태인은 전통의 메신저
  유태의 격언에 '늙은이는 자신이 두 번 다시 젊어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젊은이는 자신이 늙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이미
인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늙은이와, 인생을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엄청난 세대 차가 생기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즉 요즘 같은 핵가족 사회에서는 노인이
경멸 당하고 그로 인해서 문화의 전통성을 잃어 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문화적 전통은 마치 공기나 물과 같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유태의 노인들은 전통을 전하는 '메신저'이기 때문에 결코 경멸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를 다음
세대에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또한 젊은이들도 노인들의
귀중한 체험을 통해 5천 년 유태민족의 역사와 지혜를 배우며, 아울러 생활
방법도 터득한다.
  히브리어에는 경어가 없다. 대신 노인들에게는 공손한 태도로 이야기하는
것이 존경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노인데 대해 난폭한 행동이나 예의에 어긋난
말을 하는 사람은 유태의 전통을 무시하는 자로 취급되어 멸시를 받게 된다.

  노인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중시한다
  노인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은 구약성서에도 언급되어 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19장 32절)

  젊은이들은 노인을 인간으로서의 역할이 끝난 '퇴물'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동양에서는 지난날 나이 많은 노인들을 깊은 산 속에 버리는 풍습까지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럴 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노인을 문화의
전달자로서 존경하고 있는 유태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육체'가 시든 노인들일지라도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그들의 '정신'을
높이 사는 사고방식이 뿌리 내린다면, 노인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노인은 불쌍한 사람도, 버림받을 이유도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후손들에게
지혜와 충고를 제공하는, 존경받아 마땅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노인은 불쌍한 사람도, 버림받을 이유도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후손들에게
지혜와 충고를 제공하는, 존경받아 마땅할 존재이다.

  51. 부모에게 받은 만큼 자식들에게 베풀어라
  부모는 주기만 하고, 자식은 받기만 한다
  유태인 가정에서의 부모 자식 관계는 '기브-언-테이크'관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자식도 그만큼 부모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유태인과 거리가 멀다.
  유태인들은 예로부터 부모는 오직 줄뿐이고 자식은 오로지 받으면 그만인
존재로 생각한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너는 너희들로부터 아무것도 되돌려 받을 생각이
없어. 만약 내게 보답하고 싶은 생각이 있거든 이다음에 너희 아이들에게
엄마가 너희들에게 했던 것처럼 하면 돼. 그것이 나에게는 제일 기쁜
일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에서이다.
  나의 이와 같은 생각도 사실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내가 IBM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언젠가 봉급에서 얼마를 떼내어
어머니의 선물을 산 적이 있었다. 무엇을 샀는지는 잊었지만, 당시 나의
형편으로는 비교적 비쌌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선물을 받고는 '왜 이런 것을 사왔느냐'고 내게 물으셨다.
'어머니가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고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손을 내저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딱 잘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니야, 내가 너를 키우는 건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란다. 내게 보답하고
싶거든 나중에 시집가서 네 아이들에게나 그렇게 해주어라."

  내 친구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젊었을 때에
집을 장만하기 위해 부모님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 돈을 당연히 빌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3년 동안 열심히 저축을
해서 그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부모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녀 역시 나와
똑같은 이유로 그 돈을 돌려 받았다는 것이다.
  유태인의 부모들은 늙어 병이 들어도 자녀들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병든 부모를 돌볼 때만큼 신경 쓰이는 일도 없다. 병든 부모를 돌보는
것은 '보은'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애정과 자식된 도리임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10년후'를 생각한다
  <탈무드>에는 이와 같이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다룬 일화가
있다.

  한 노인이 뜰에 묘목을 심고 있었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
광경을 보고 물었다. 
  "언제쯤 그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할 수 있습니까?"
  "70년쯤 후에나 ..."
  노인의 대답에 나그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노인장께서 그때까지 사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닐세. 내가 태어났을 때 과수원에는 열매가 잔뜩 열렸었네. 아버지께서
심어두셨기 때문이지. 나도 그저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할뿐이라네."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다시 그 자신의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금까지도 면면하게 지켜지고 있는 유태의 전통중 하나이다.
  동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고, 자식은 당연히 부모의 시중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물론 자식의 부모에 대한 애정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그 애정을
새로운 세대에 쏟는 것이 미래를 위한 확실한 방법이라고 우리 유태인들은
생각한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 가정에서의 부모 자식 관계는 '기브, 언, 테이크'관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자식도 부모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유태인과 거리가 멀다.

  52. 남한테 받은 피해는 잊지 말라, 그러나 용서하라
  복수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유태민족의 역사는 바로 '박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동안 받아온 박해에 대해 복수를 해야 한다거나, 상대를 증오하는 내용이 담긴
유태의 문헌은 하나도 없다. 복수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태의 자녀들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악한 자가 너에게 가한
짓을 잊지 말라. 그러나 용서하라'고 배우면서 자라난다.
  유태인들에게 가해진 잔인한 박해는 비단 나치스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 왕 아하슈에로가 간신 하만의 말에 따라, '12월, 곧 아달의 달 13일
하루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유태인을 도륙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라(에스더 3장 13절)'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명령은 다행히 실행되지 않았지만, 크리스트교가 유럽을 지배한 이후로
유태인에 대한 박해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자행되었다.
  1215년 라테란 교회의 회의에서는, 유태인을 구별할 수 있도록 황색 또는
진분홍색의 헝겊조각을 달고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의를 했고, 심지어는
여러 사람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다니게까지 했던 것이다.

  <안네의 일기>는 유태인들의 개인적 역사
  그러므로 나치스에 의해서 저질러진 박해는 유태민족의 '박해의 역사'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사건에 불과하다. 유태인은 노란 색 별을 달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자전거를 공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차도, 자동차도 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후 3시부터 4시 사이에만 물건을 사야 한다. 그것도 유태인
상점이라는 표시가 있는 가게에서만 살 수 있다. 그리고 유태인은 밤 8시
이후에는 반드시 집 안에 있어야만 한다.

  이 글은 네덜란드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나치스 치하에서 쓴 <안네의
일기>중 일부분이다.
  안네는 결국 강제수용소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유태인의 개인적인 역사인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소년 시절을 독일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나치스에 의해 교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신은 김나지움(대학 진학을
위한 정규 예비교육학교)에서 퇴학당해 부득이 유태인 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가 열네 살 때까지 14명의 친척들이 나치스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래서
키신저 일가는 하는 수 없이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되풀이해서
말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일 이 없도록 하라. 역사란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 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마빈 토케이어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B라는 글자로 시작한다. 히브리어의 B는 왼쪽이 열려 있는
모양이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므로 오른쪽의 과거는 닫혀
있지만, 왼쪽의 미래는 열려 있다."
  즉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것이다.
  복수나 증오는 과거에 얽매인 부정적인 태도이다. 그보다는 모두를 깨끗이
용서하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건전한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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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나 증오는 과거에 얽매인 부정적인 태도이다. 그보다는 모두를 깨끗이
용서하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건전한 삶일 것이다.

  53.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의 긍지를 심어준다
  '이 사람은 유태인이다'라고 항상 말한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아들러, 트로츠키, 키신저, 프루스트, 샤갈,
로스차일드, 구다스, 미요, 토머스 만, 아서 밀러, 하이네, 프란츠, 카프카,
맨델스존 등의 유태계 사람들이 과학, 예술, 문화, 정치, 경제를 포함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지금도 많은 유태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족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중 반드시 한 번쯤은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유태인은 전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야기 속에 유태계 위인이 등장할 때는, 아이들에게 '이분은
유태인이다'라고 반드시 말해 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인물에 대해 대단한
친근감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사람의
행적을 굉장한 자랑거리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은 긴 세월 동안 조국이 없는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민족으로서,
유태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도우며 가까이 지낸다.
  토케이어 씨는 랍비 신분으로 일본에 부임하기 전, 일본 규슈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사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오기 전까지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 가운데 유태인은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단 이틀만에 그 두 사람은 서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유태인끼리는
자석같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 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이 강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위인이 유태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들이 자기 친척인 듯한 기분에
젖는다.
  그리고 차츰 세계사에서 유태인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되고, 아울러 그 이면에 흐르는 박해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과연
유태인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수한 유태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태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며, 세계를 이끌어나갈 주역인
어린아이들에게도 큰 격려가 되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자기 민족의 위인들에 대해 얘기해 줌으로써
민족적 긍지를 심어준다.